감산사 |본원정사

대한불교신문 불기 2546년 3월 6일자
미륵불과 아미타불 외호한 신라 천년의 쓸쓸한 숨결
한국의 사찰 남월산 감산사

완연한 봄의 기운이 감도는 2월의 마지막 주에 찾아간 곳은 신라 천년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경주.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역을 지나 조금만 달려가면 토함산 기슭에 괘릉리가 자리잡고 있다.

괘릉리의 지명인 괘릉(掛陵)은 세간에 전해오기를 수중에 장례지낼 때 임금의 관을 걸어 돌 위에 놓고  흙을 쌓아 능을 만들었으므로 불려진 이름으로 『동경잡기』의 수장설에 의거하여 오랫동안 문무왕릉으로 잘못 전해오기도 하였으나 1967년 신라삼산오악학 술조사단의 탐구로 대왕바위가 문무왕릉으로 공인되고 원성왕릉은 토함산 서편 골짜기 곡사(鵠寺)에 있다는 최치원의 「대숭복사비문」과 『삼국유사』 의 기록에 근거하여 38대 원성왕릉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여느 마을에 비해 제법 큰 규모의 마을회관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토함산이 남으로 이어지는 남월산의 서쪽 기슭 초입에 바로 감산사(甘山寺)가 객을 반기는데 감산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 제3권, 남월산(南月山) 조(條)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절은 경성 동남쪽 20리에 있는데, 금당 주불인 미륵불과 아미타여래의 '화광후기(火光後記)'를 인용하여 창건연기를 밝히고 있다.

미륵불의 화광후기에는 "신라 제33대 성덕왕 18년(719)에 중아찬 김지성(金志誠)이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과 어머니 관초리부인을  위하여 감산사와 석미륵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 이찬과 아우 간성 소사, 현도사를 비롯해 누이 고파리, 전처 고로리, 후처 아호리와 또 서족 급막 일긴찬, 일당 살찬, 총민 대사와 누이동생 수혜매 등을 위하여 이 착한 일을  했다며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이 되자 동해유변에 산골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아미타불의 화광후기에는 "중아찬 김지성이 일찍이 상의로서  임금을 모시고  또 집사시랑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 나와 한가롭게 지내다 국주대왕과 어찬 개원, 돌아가신 아버지 등을 위해 감산의 장전(莊田)을 희사하여 절을 세웠다. 또 석미타 하나를 만들어 아버지를 위해 봉안하였는데 그가 고인이 되자 역시 동해유변에 산골하였다."라고 전한다.

이런 기록들이 내려오는 감산사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3월에 아미타불상 1구와 미륵보살상 1구가 발굴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보 제81호로,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은 국보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불은 복잡한 장식이 있는 관을 썼는데 그 윗부분에 작은 부처의 앉은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보살의 관에 그러한 불상이 있는 것은 대부분 관음보살을 나타내나 이 석불은 명문에 미륵보살로 명시되어 있으므로 특이한 경우다.

이 보살상은 커다란 주형광배와 불신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연꽃의 대좌 위에 얹혀있는 형태로 얼굴은 살이 찐 편이고  큰 코와 꽉 다문 두꺼운 입에서 약간 이국적인 인상을  느낀다. 대좌는 한개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맨 위에는 위를 향한 앙련(仰蓮)이 있고  그 밑에는 복련(覆蓮)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맨 밑에는 팔각대석을 받쳤다.

불상 전체로 보아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비튼 자세이며 어깨는 넓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둥글고 통통한 팔뚝으로 이어지고 허리와 두 다리의 신체적 굴곡을  강조하듯 표현된 옷주름의 처리 등이 매우 육감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천의를 걸친 형식이나 목걸이, 허리띠 및 치마를 입은 모습에서  삼국시대 보살상의 양식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미타불은 불신, 광배, 대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됐는데 불신과 대좌의 높이 비율이 3:1이고  등신대의 불신에 적당한 광배로 전체적인 구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균형을 이룬 구도는 형태에서  잘 나타나 머리와 불신의 높이 비율이 1:4로 굴불사지석불상 중 아미타상이나 벽도산아미타상과 함께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인 것이다.

이 불상은 비록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강건한 풍모의 석불입상이지만 부풀고 풍만한 얼굴이면서도 눈, 코, 입 같은 세부적인 것들을 세련되게 표현해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사암 불입상 같은 이국적인 과장이 보이지 않는 신라적 얼굴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떡 벌어진 가슴과 팽팽한 어깨, 당당하게 버티고 선 위엄 있는 자세 등으로 감각적인 사실주의 표현과는 거리가 있기도 한데 얼굴이나 신체의 묘사에서  자비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부처님의 위엄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를 등지고 있는 이 불상은 당당하고  위엄이 넘치며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감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지만 신체 각부의 탄력적인 표현과 함께 박진감이 넘치는 표현은 인체를 이상적인 불신으로 승화시켜주고 있다.

현재 융성했던 절터는 대부분 전답으로 변하여 이젠 고풍스런 한옥 한 채와 근래에 새로 지은 간이법당과 요사채 한동씩이 있으며 현재 법당에 봉안된 1미터 정도의 비로자나불 좌상은 1920년경 현재의 자리에서 밭갈이를 하다가 출토된 것으로 가부좌한 자세가 안정감이 있으나 무릎부위가 머리와 상체에 비해 다소 큰 느낌이 있고 법의는 두 어깨에서 양팔에 걸쳤으며 이마엔 백호가 있다.

또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인 감산사지삼층석탑 1기가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데 이 탑은 역시 719년에 김지성이 창건한 감산사의 석탑으로 도괴되었던 것을  지난 65년에 재건했으며 통일신라 양식의 2층 기단으로 된 3층 석탑으로 하층기단은 4매석, 상대감석을 2매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2.3층 탑신과 상륜부가 분실되어 있어 쓸쓸함을  더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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