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55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답파천산설(踏破千山雪) …<5>


제자의 절을 받으신 큰스님은 모처럼 웃음을 보이신다.


 “조실도 마다하고 덕숭산 중에 묻혀 지낸다며?”


 “예 덕숭산에 있었습니다."


 “만공화상이 칭찬을 아끼지 않던데 허중실(虛中實)인가 실중허(實中虛)인가?”


 “둘다 과찬(過讚)입니다.”


 “그렇다면?”


 “무실무허입지요.”


 “무실무허(無實無虛)라? 어디서 듣던 말 같은데․․․.”


 인곡당은 갑자기 딴전을 피운다.


 “스님이 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유생들이 쓰는 것을 썼느냔 말인가?”


 “조금은 보기가 민망스럽습니다”

 “이것 역시 무실무허(無實無虛)지.”


 인곡당은 내심 ‘앗차!!’했지. 스승님에게 한 방망이 맞은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기 선원에서 한철 지내지 않으려나?”


 “만공큰스님 모시고 유점사로 가기로 했습니다.”


 “오~라. 유점사에 선원을 개설했다더군. 그래 그게 좋겠구먼.”


 “늘 스님 슬하에 살면서 단 한철이라도 시봉을 드리는게 저의 소망입니다만 그럴 기회가 아직 안 옵니다.”


 “생각만 가져 주어도 고맙구만. 공부 잘하는게 나를 시봉하는 것이지.”


 “·············· ”


 “공부 잘하면 내 문하의 기린아(麒麟兒)라. 이제부터는 인곡(麟谷)이라 하는게 좋겠구나.”


 “인(仁)자를 기린 린(隣)자로 고쳐 쓰라는 말씀입니까?”


 “어질 인(仁)자도 좋긴 하지만 너무 순해서 선승(禪僧)다운 맛이 모자라단 말이지?”


 “스님께서 허명하시니 받들어 사용토록 하겠습니다.”


 오늘을 계기로 인곡(仁谷)과 인곡(麟곡)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한번 인곡(仁谷)으로 썼으면 남들은 모두 어질 인자로 기억하기 마련인지라 좀처럼 기린 린자로 바꿔지지 않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아무튼 음이 같아서 모두 헷갈림 없이 인곡으로 불러 주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다.


 인곡당(麟谷堂)이 만공조실을 모시고 유점사에 당도한 것은 음력 9월 초이레였다.


 현 주지 혼성(混惺)스님은 정묘년(丁卯年 1927년)에 제6세 주지로 부임하였는데 여지껏 운영해온 동국경원(東國徑院)을 선원(禪院)으로 바꾸어서 금년 동안거부터 납자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헌데 유점사에서는 겨울에 30명 대중을 받기로 했는데 10월이 되기도 전에 40명에 육박했으니 받아들여야 할지 어떨지를 놓고 조실스님과 주지스님이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선원을 처음 개설하는 마당에 인원을 정하여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조실스님의 말씀에 혼성주지(混惺住持)는 딱 거절한 처지가 못되었다.


 “그럼 동안거는 제한을 두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결제일이 되자 선원대중은 무려 53인의 납자들이 큰방에 꽉 들어찼다. 조실스님은 기분이 좋으셔서 대중을 주욱 둘러 보시고는 이르신다.


 “화엄경에 53선지식이 계시더니 유점사에는 서역국에서 53불이 돌배에 모셔져 오셨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 동안거에 53납자가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닌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원력을 세운 인연으로 모인 것이니 모두들 신명(身名)을  떼어놓고 정진해 주기 바란다. 그렇게 정진함으로써 외호해 주신 주지스님과 소임자 스님들에게 보답이 되는 것임을 명심하기를 일러두는 바이다.”


 조실스님은 주지스님의 입을 봉쇄하시려고 무척 조심하시는 것이었다.


 만공조실은 결제법어를 통해 대중들의 용맹정진을 강조하신다.


 “임제선사(臨濟禪師)는 40이 넘도록 좌주(座主)로 있으면서 4백여명의 학인들을 위해 삼장(三藏)을 강의하셨느니라. 하루는 한 학인이 여쭙기를,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법문을 인용하지 마시고 스님의 친답(親答)을 듣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니 이에 임제스님은 바로 대답을 못하고 말았는데 며칠을 두고 이 문제를 심사숙고해 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더니라. 이에 학인들에게 이르기를, ‘내 몇일을 생각한 끝에 좌주의 소임을 내놓기로 했다. 과연 부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먹물옷 입고 절집에 산다는 것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도 더 늦기 전에 내 부처를 찾으러 떠나는 바이니 너희는 눈밝은 스승님을 만나서 대사를 성취하기 바란다.’고 선언하고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황벽회상(黃蘗會上)으로 갔더니라. 임제스님은 이렇게 재발심하여 참선의 길로 나아가서 뼈를 깎는 정진 끝에 대사(大事)를 판가름한 것이니라. 대중이여 53불이 좌정하신 이 도량에 53납자가 모였으니 이 겨울에 기필코 칠통을 타파하여 53선지식(善知識)이 되기를 간곡히 당부하는 바이니 촌각을 아껴 용맹정진하기 바란다.”


 조실스님은 차 한모금 마신 뒤 주장자로 법상을 한차례 탁 치시고는 낭랑한 음성으로 읊으신다.

 

  塵勞廻脫事非常이라

  緊把繩頭做一場이어다

  不是一番寒徹骨이면

  爭得梅花僕鼻香고?


 티끌을 훤출히 벗기란 일이 쉽지 않나니

 긴히 화두를 잡아 한 마당 지으라

 한번 차가운 기운이 뼈를 사무치지 않았던들

 어찌 매화 향기가 코를 찌를 수 있었으랴?


 만공조실의 법문은 간단명료 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하기야 정진대중에게 정진 잘하한 말씀 외에 무슨 법문이 필요하겠는가?


 인곡당은 조실스님의 그러한 취향이 마음에 썩 들었다.


 법문이 길다 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되도록 짧게 요약해서 하는 것이 듣는 이로 하여금 오래 기억하게 한다.


 조실스님은 인곡당을 선덕(禪德)으로 용상방(龍象傍)에 올리도록 명하셨다. 인곡당의 사양도 아랑곳 없이 젊은 인곡당을 입승(立繩) 다음의 선덕으로 추대한 것은 인곡당의 공부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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