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54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답파천산설(踏破千山雪) …<4>


인곡당은 정혜선원에서 산철을 고스란히 보내고 동안거(冬安居)도 알차게 정진으로 일관했다.


 겨울을 나면서 만해(卍海)스님의 상족(上足)인 춘성(春城)스님과 나란히 앉은 인연으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춘성스님은 성품이 호탕하여 대중을 잘 웃기기로 소문이 널리 났으며 길을 가다가 헐벗은 사람을 만나면 승복을 벗어주고 알몸으로 돌아오곤 하여 ‘자비보살’또는 ‘무애도인’이란 칭호를 듣는 스님이다.


 춘성스님은 설악산 백담사(雪嶽山 白潭寺)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만해(卍海)스님의 상좌가 되었으며 6척 장신으로 힘이 세기로도 따를 자가 없는 위인이다. 한번 앉으면 아침이 밝기까지 꼼짝도 않고 선정에 들기를 예사로 하고 기미만세(己未萬歲) 당시에도 도봉산 망월사(道峰山 望月寺)에 동산(東山)스님과 함께 정진하면서 만해․용성 두 스님의 옥바라지를 성실히 해냈었다.


 인곡당은 정혜선원(定慧禪院)이 맘에 들었다. 큰스님이 계서서인지 마치 어머니품 안처럼 늘 포근했다.


 신미년(辛未年) 동안거 해제 후 대중들은 거의 걸망을 챙겨 행각에 나섰으나 인곡당은 어인 일인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조실스님은 서울 선학원(禪學院)에도 자주 가신다. 선학원 조실을 겸한 때문이다. 서울에서 용성(龍城)선사와 자주 만나므로 인곡당은 앉아서 스승님의 안부를 비교적 자주 듣는다.


 조실스님은 용성선사의 8세 연하(年下)이지만 가장 가까운 도반 사이여서 선학원 운영문제와 선객들의 장래에 대해 서로 의논하는 등 상부상조(相扶相助) 해 오고 있다. 그런데 두 거목(巨木)이 긴히 만나는 목적은 실로 딴 데에 있다.


 기미만세 이후 불교계 인사들은 극비리에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운동을 펼쳐오고 있는데 용성․만공의 두 스님이 핵심인사인 것이다. 기미만세운동을 의논할 적에 처음에는 31본산 주지가 모두 대표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대표자들이 왜경에 붙들려 수감된다면 옥바라지는 누가 하며 계속적으로 만세운동을 펼 인사로 주지급이 아니면 과연 누가 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미치자 만세운동에는 용성․만해 두 스님만 대표로 가담하고 31본산 주지들은 만세운동을 지속적으로 끌고 가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미년 이후 각 본산 주지스님들은 다방면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요원에게 전달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만일 왜경이 눈치 채면 불교계는 가혹한 보복을 받게 될 것이 뻔하므로 어디까지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본산 주지들은 겉으로 친일행위(親日行爲)를 서슴치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였다.


 각설하고, 내친 김에 하안거(夏安居)까지 정혜선원에서 정진한 인곡당은 마치 본방대중인양 해제 후에도 마냥 포단을 떠날 기색이 없었다. 진종일 묵언 아닌 묵언으로 일관한데다 장좌불와(長坐不臥)까지 하고 있으니 ‘말뚝수좌’,  ‘바위덩이수좌’란 별명이 딱 들어맞는다.

 인곡당은 운문선원 조실로 5년간이나 있었으니 본분납자(本分衲子)임에는 틀림이 없겠는데 무슨 미진한 것이 남아서 저렇게도 철저히 쪼아대는 것일까? 산철인데도 앉아 있는데 선객이 있으니 큰방은 늘 적요만이 흐른다.


 기실 큰방은 방선하면 대중들이 쉬면서 선사스님들의 오도기연(悟道機緣)이나 선방생활에서 이렁났던 법거량(法擧揚) 등으로 꽃을 피우기 마련인데 단 사람이라도 포단에 앉아 있는 이가 있으면 일체 담론이 끊어진다.


 그만큼 대중들 서로가 정진하는 이를 존중해 주는 미덕이 어느 선방이고 다 있는 것이다.


 인곡당은 작년 하안거와 동안거 그리고 하안거로 이어지는 만 1년여를 포단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니 큰방은 늘 정진대중이 모여 결제․해제가 따로 없었다.


 방죽을 파면 물이 고이고 물이 고이면 고기가 모여든다던가? 큰방이 적요로우니 정진대중이 끊이질 않은 아름다운 풍속도가 일년 이상 정혜선원에서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하순이 되자 여름 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괜찮은데 움직였다 하면 땀이 절로 난다.


 헌데 금강산 유점사(愉岾寺)에서 두 분 스님이 조실스님을 뵈러 왔다. 유점사 선원 조실로 초빙하러 온 것이다.


 결제 때와 해제 때만이라도 주석해 주십사하는 간청을 만공조실은 차마 딱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만공조실이 금강산으로 가시게 되자 정혜선원에서는 모두가 울상이었다. 그래서 인곡당은 조실스님께 나아가서, “조실스님 모시고 저도 가겠습니다”하고 청했다.


 조실스님은 인곡당의 정진 모습에 감명받은지 오래인지라 쾌히 승낙하신다.


 “인곡당이 원한다면 내가 모시고 가마.”


 인곡당은 미소로써 큰스님 농을 받아들인다. 조실스님은 가장 절친한 도반의 제자인 인곡당을 친상좌나 다름없이 여겨오신 것이다.


 만공조실에게 춘성당(春城堂)도 친상좌 예우를 받고 있다. 독립운동의 동지(同志)인 만해(卍海)스님의 상좌이기 때문이다.


 춘성당은 지난 봄에 북방으로 이미 떠났으므로 만공조실을 모시고 걸망을 챙긴 사람은 시자(侍者)스님인 용음당(龍吟堂) 인곡당 그리고 젊은 선객 두 사람이었다.


 조실스님 일행이 덕숭산을 출발한 것은 음력 8월 하순이었고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닷새를 쉬고 9월 초순에 비로소 금강산으로 향했다.


 선학원에 걸망을 내려놓은 인곡당은 조실스님께 말씀드리고 대각교당(大覺敎堂)으로 스승이신 용성(龍城)큰스님을 뵈러 갔다.


 용성큰스님은 일인(日人)들의 눈 밖에 난지 이미 오래였는데 일인들은 자기네 정책인 사찰령(寺刹令)에 반대한다는 구실로 대각교당에 폐쇄령을 내려 신도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래서 용성스님은 대각교당에 대각교(大覺敎)라는 간판을 내걸고 당신은 깎은 머리에 두건을 써서 애써 사문(沙門)의 행색을 지웠다.


 그러면서 역경(譯經)에 있어서도 보살(菩薩)을 정사(正士)라 번역하고 불타(佛陀)를 대각(大覺)이라 번역하여 호칭했다.


 일인들의 박해가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일반신도들의 발길은 더욱 늘어나서 진종일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이를 지켜본 왜경(倭警)들은 기가차서 별의 별 구실을 지어내어 핍박해 왔지만 신도들의 자발적인 함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와중에 인곡당은 스승님을 뵈러 찾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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