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52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답파천산설(踏破千山雪) …<2>


용성큰스님은 제자의 절을 받고 흐믓한 마음이었다.

 

 “주지스님께서도 무양(無恙)하시구?”

 

 “예, 스님.”

 

 “내가 인곡(仁谷)을 얻은 것은 순전히 만암주지 스님의 덕분이었지. 조실자리에 앉으니 어떻던고?”


  “고여시 금여시(古如是 今如是)입니다.”

 

 “그래? 그럼 착(着)이 생기겠는걸.”

 

 “착(着)은 벌써 생겼습지요.”

 

 “허허허허~”

 

 큰스님은 박장대소 하신다.

 

 “그만하면 믿을 만 하군.”

 

 이튿날 사시(巳時), 인곡조실은 마지못하여 법상에 올랐다.


 어간에는 법주이신 큰스님이 좌정하시고 선객스님들이 차서를 따라 양옆으로 앉았으며 일반신도들은 법당 안이 비좁도록 꽉 차게 앉아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병법(秉法)스님의 낭랑한 목소리만이 법당 안에 가득한 가운데 청법의식이 끝났다.


 인곡조실은 주장자를 들어 바른손으로 세워 잡고 양구(良久)에 들어갔다.


 법주큰스님은 제자의 성숙된 법문을 기대하면서 조용히 두 눈을 내리뜬 채 시공(時空)을 잊는다.


 그런데 법사스님은 어찌된 영문인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자리를 가득 메운 사부대중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사자후를 애타게 기다리느라 기침소리를 내는 이도 없다.


 옛날 세존(世尊)께서 설법하시려고 좌에 높이 앉으셨는데 문수사리(文殊師利)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뢰기를,


 “유언(有言)도 묻지 않고 무언(無言)도 묻지 않나이다.”했다.


 유언․무언에 착하지 마시고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하는 주문이었다.


 이에 세존께서는 양구(良久)하셨다.


 이에 문수사리는 세존에게 찬양하기를


 “기재(奇哉)라. 세존이시여 세존의 사자후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인 가득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인곡조실도 아무 말씀이 없이 한 시간가량 선정에 들어 있더니 대중을 한바퀴 주욱 둘러보고는 이내 법상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때 법주큰스님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중을 향해 이르시기를,


 “이것이 참 설법이며 이것이 삼세제불의 근본 진리이며 이것이 역대조사(歷代祖師)의 안목(眼目)이니 삼세제불과 역대조사, 그리고 법계함령(法界含靈)의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니라.” 했다.


 이 말씀에는 인곡조실을 칭찬함이 가득 배어 있음은 물론이다.


 인곡조실의 무언설법(無言說法)은 입에서 입을 통하여 제방선원과 각 사찰에 빠른 속도로 번져가서 기존의 원로스님을 이어 새 도인스님이 나셨다고 모두들 칭송이 자자하였다.


 경오년(庚午年 ․ 1930년) 봄, 인곡조실은 큰절로 내려가서 만암(曼庵)주지스님을 뵈었다.


 “저 만행(萬行)을 나설까 합니다.”

 

 “왜 몇 해를 살고 보니 지겹더냐?”


 “예, 굉장히 나태해진 것 같습니다.”


 “글쎄... 그럴 법도 하다만...”


 주지스님은 수긍하면서도 선뜻 허락을 못내린다. 다음 조실을 모셔야할 일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선객은 원래 철새이기도 하고 야생마이기도 하다만 몇 철 더 머물면 안되겠느냐?”

 “이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음... 그렇구만...”


 인곡조실로서는 만암화상이 은사(恩師)나 다름없으므로 사실 명을 어길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염화실(@化室)을 지키는 일이 철새 기질이 농후한 선승(禪僧)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절에서 30년, 40년을 산다는 것은 정말 상근기(上根機)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조주(趙州)선사는 80세에 행각을 끝내고 석가장(石家庄)의 관음원(觀音院) 방장(方丈)이 된 이래 40년을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다가 120세에 시적하셨다.


 또 고봉원묘(高峰原妙)선사는 도를 깨친 뒤 천목산(天目山)으로 들어가 17년을 계시다가 58세로 입적하시었다.


 이렇게 한 곳에 오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만암주지스님은 선객들의 심리를 잘 간파하고 있었으므로 인곡조실에게 선객은 철새 같다느니 야생마 같다느니 하고 선수를 쓰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며 젊디 젊은 인곡당이 그대로 5년여를 운문선원에 머문 것만도 고맙기 그지없다. 그래서 강권을 쓰지 않으시고 자의에 맡기신 것이었다.


 인곡조실은 대중에게도 행각승으로 돌아가게 됨을 알렸다. 5년여를 살았것만 짐은 처음 올때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걸망 하나 뿐이었다.


 걸망에는 가사․장삼․발우 외에 옷 한 벌이 고작이었다.


 선객은 입은 옷을 세탁할 적에 갈아 입을 누더기 한 벌 있으면 족한 것이다.


 조실자리를 내놓고 행각에 나섰으니 이제부터는 ‘인곡조실’이 아닌 ‘인곡당(仁谷堂)’으로 호칭하기로 하자.


 운문선원에서 선원 밖으로 나가는 길은 두 길이 었다.


 큰절로 내려가는 길과 산등성이로 구암사(龜岩寺)로 나가는 길이다.


 큰절로 내려가는 길은 비교적 순탄한 큰길이고 구암사로 가는 길은 좁고 험난한 길이다.


 인곡당은 구암사 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큰절로 내려가다가 혹 주지스님이나 노덕스님네를 만나게 되면 행각이 좌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염화실 시자(侍者)가 일마장 가량 걸망을 지고 왔는데 인곡당은 굳이 돌아가라고 해서 선원으로 돌아갔다.


 혼자가 되니 비로소 천근의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하고 시원 상쾌하였다.


 그 홀가분하고 시원 상쾌한 맛 때문에 선승들은 철새가 되는 것일게다.

 인곡당은 구암사에서 하룻밤 묵고 다시 걸망을 챙겨 정읍(井邑)으로 나가서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조실자리가 좋았던지 객승이 되어 여러 암자를 찾을 적에는 조금은 쓸쓸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조실은 산중의 어른이나 객승이 찾아오면 그들을 앉아서 맡고 또 하룻밤 묵어갈 것을 허락한다.


 그러던 그가객승이 되어 하룻밤으로 부탁하자니 조금은 쓸쓸하다는 말이다.


 하안거가 임박하여 그는 덕숭산(德崇山) 정혜선원(定慧禪院)에 닿아서 방부를 드렸다.

 

 Copyright (C)  2001. Daegak.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