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51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답파천산설(踏破千山雪) …<1>


기사년(己巳年 서기 1929년), 이 해는 우리 불교계의 큰별이신 환응(幻應)선사와 학명(鶴鳴)선사를 잃게 되는 비운의 해이다.


 환응선사는 1847년, 즉 헌종(憲宗)13년에 무장현(茂長縣)에서 태어나셔서 금년에 83세로 시적(示寂)하셨다.


 고창 선운사(禪雲寺) 성일화상(性鎰和尙)의 상좌로 수계한 것은 14세 때이다.


 16세에 백양사 운문암(雲門庵)의 경담강백(鏡潭講伯)에게 나아가 내전(內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경담강백은 선교율(禪敎律)을 고루 갖춘 선지식으로서 운문암이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중창한 큰스님이다.


 19세 때 경담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구암사(龜岩寺)의 설두(雪竇) 화상과 송광사(松廣寺)의 우담(優曇) 화상에게 참학하여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수학했다.


 31세에 경담큰스님께 입실(入室)하여 환응(幻應)이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스승님에게 전강을 받아 운문암에서 20여년을 강석(講席)에 계셨다.


 이어 백양사 산내 암자인 청류암(淸流庵)과 큰절에서 후학을 길렀으며 만년에는 운문암 곁에 우은난야(愚隱蘭若)를 묻고 호젓이 참선에 전념하였다.


 스님은 일종식(一終食)을 평생을 두고 행하셨으며 계행이 엄정(嚴淨)하기 빙설(氷雪) 같으셨다.


 제자 호명(浩溟)이 선운사(禪雲寺) 주지가 되자 스님을 모셔다가 동운암(東雲庵)에 주석하시도록 하였다.


 그래서 선운사에서 입적하셨는데 사리(舍利)가 수백개나 나왔고 방광(放光)을 사흘이나 하였다.


 한 때 우리 불교계는 종정(宗政) -당시는 교정(敎正)이라 했음- 을 7인을 선출한 적이 있었는데 환응스님이 7인교정(七人敎正)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스님은 남의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으셨고 늘 과묵하고 화두를 챙기는 일에 열중하셨으며 일생동안 남에게 모진 말씀을 단 한번도 하신 적이 없었다.


 환응큰스님이 음력4월 7일에 시적(示寂)하셨는데 이보다 조금 앞서 3월 27일에는 학명(鶴鳴)선사께서 입적하셨다.


 선사는 고종(高宗) 4년(1867년)에 영광(靈光)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백씨(百氏)이다.


 어려서 불갑사(佛甲寺)에서 중이 되어 뒷날 백양사(白羊寺)․구암사(龜庵寺)․내장사(內藏寺) 등 사찰에서 수학하였고 지리산 천은사 수도암(修道庵), 벽송사(碧松寺), 구암사(龜庵寺), 내장사 등 여러 곳에서 강(講)하다가 참선으로 업을 삼았고 마침내 크게 깨쳐 대도인(大道人)이 되었다.


 학명선사는 선승(禪僧)으로서의 본본을 잘 지켜온데다 교육과 포교에도 남달리 정열을 쏟았으며 특히 선농겸행(禪農兼行)을 강도 높게 역설하였다.


 사문(沙門)은 백장(百丈)선사의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가르침을 따라 참선과 농사일을 겸행해야 함을 주장하였고 자신도 농사지으며 참선하였던 것이다.


 여지껏 우리 불교계는 기존의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을 선량원(禪糧源)으로 삼거나 시주자들의 불공으로 생활해 왔었는데 사문이 직접 농사일을 함으로써 선량 확보에 있어 혁신적인 단안이 되었다.


 특히 선사는 시가(詩歌)에는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종래의 한시(漢詩)만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가송(歌頌)으로 읊은 것이 많았으니 예를 들면 신년가(新年歌)․왕생가(往生歌)․해탈곡(解脫曲)․선원곡(禪園曲)․참선곡(參禪曲)․원적가(圓寂歌)․백양산가(白羊山歌) 등이 이것이다.


 위의 노래들은 문학성(文學性)이 뛰어나고 불교의 사상과 정신이 꽉 배어있어서 품격이나 수준이 범상(凡常)을 훌쩍 뛰어넘는다.


 불교계는 환응선사와 학명선사를 이 봄에 잃었다.


 일제(日帝)의 탄압이 극심하고 한국 불교를 왜색화(倭色化)하려는 책동이 자심한 이 시기에 큰스님을 한꺼번에 잃은 것이다.


 한편 서울 봉익동(鳳翼同) 대각교당(大覺敎堂)에서는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칠원하순에 크게 선회(禪會)를 베풀었다.


 이 절의 조실이자 법주(法主)이신 용성선사(龍城禪師)는 해제 기간에 선방의 선객스님들의 내왕이 잦은 것을 감안하여 이번에 선회를 열었는데 굳이 조실급이 아닌 구참납자(久參衲子)도 법사(法師)로 모셔 설법하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래서 이번 선회를 무차선회(無遮禪會)라 이름했으며 제방의 조실스님들은 따로 청첩장을 발송했다.


 운문선원의 인곡조실(仁谷祖室)은 청첩장을 받고 선뜻 응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스승님이 법주이신데 어찌 감히 스승님 앞에서 설법할 수 있단 말인가?


 몇일을 궁리끝에 큰절로 내려가서 주지이신 만암화상(曼庵和尙)을 뵈었다.


 “그동안 정진에 여일(如一) 하였구?”

 “예.”

 “산철이라 대중이 많이 줄었다며?”

 “예, 모두 행각에 나서고 큰방에 다섯분이 남았습니다.”

 “조실 자리는 편한 자리가 아니지. 그런데도 잘 지키고 있으니 고맙구나.”

 “이번에 서울 대각교당에서 무차선회를 열었는데 절더러 참여하라는 청첩장이 왔는데요.”

 “법사로 초빙한 것이지?”

 “예.”

 “가거라. 가서 법사스님께 인사드리고 대중을 위해 사자후(獅子吼)를 하렴.”

 “저 같은 풋내기가 큰스님 화상에서 어떻게 법문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고? 사자굴중(獅子窟中)에는 무이수(無異獸)라 하지 않더냐?”

 “......”

 “여비는 내가 마련해 놓을 터이니 올라가서 행장을 챙겨 오도록 하거라.”

 인곡조실은 주지스님의 말씀을 듣고서 비로소 용기가 생겼다.

 그리하여 인곡조실이 대각교당에 당도한 것은 무차선회가 반쯤 지난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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