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92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시적(示寂)…<5>

반산림이 지나자 인곡큰스님은 사대육신(四大肉身)이 더욱 무거워짐을 느끼신다. 아마도 지수화풍(地水火風)이 각기 제 자리로 환귀(還歸)하려 하는 것일게다.

 

이 몸뚱이가 분명 내 몸이요 평생을 내가 종처럼 부려먹은 충복(忠僕)인데 어찌 요즘은 천근처럼 무거워진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아직도 뚜렷하고 허리도 꼿꼿하여 앉고 싶으면 앉아서 몇시간을 비틸만 하고 누우면 편안함을 느낀다. 그런데 어이하여 무겁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일까?

 

일단 무겁다는 생각이 자꾸 반복해지자 이제는 거추장 스럽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인다. 평생을 잘 따라준 충복을 거추장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충복을 내 곁에서 떠나 보내고 나 혼자서 자유로워 지고 싶은 의욕이 마음 속 깊숙이에서 살금살금 고개를 쳐들고 기어 올라온다.

 

사대육신이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사대육신은 금생에 잠시 빌려 충복으로 길들여 왔다는 것. 언젠가는 빌려온 충복을 제 자리로 돌려줘야 한다는 것.

 

이런 것은 지극히 당연한 명제(命題)인데도 실제 생활 하면서도 철저하게 인식하며 사는 이가 극히 적은 것이 우리네 중생계의 현실이다. 그러다가 늙고 병들게 되면 사대육신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며 사대육신과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 하기도 하고 또 성질이 급한 이는 스스로 버리기도 한다.

 

몸이 무겁다고 느껴지는 시기에 이르면 사대육신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인곡스님은 담담한 가운데 이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남들에 비해 별로 잘 생긴 사대육신은 갖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각 기관이 튼튼하여 젊어서는 ‘무쇠덩이 수좌’‘말뚝수좌’니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건강했다. 다만 조물주의 장난인지 전생 업연의 결과인지 ‘습진’이라는 병마가 빌붙어서 모질게 괴롭혀온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전생에 무슨 업연을 지었길래 ‘습진’이라는 이름으로 내 몸에 달라 붙어 그토록 줄기차게 괴롭혔을까? 그 지독한 ‘습진’이라는 마구니도 이 몸뚱이를 떠나보내게 되면 몸뚱이와 함께 멀리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 병마를 생각하면 사대육신을 떠나보내는 것이 무던히도 홀가분할 것이어서 이별의 아쉬움도 남지 않을 것만 같다.

 

외숙이신 만암(曼庵)스님 슬하에서 자라면서 솔잎을 복용하는 법을 배워 자신도 솔잎을 장복(長服)한 덕으로 몸뚱이가 무쇠처럼 단단해서, 정진을 잘한 결과 이만큼 무게있는 본분납자(本分衲子)가 되었으니 사대육신에 대해 불평불만은 추호도 없다. 습진도 공부 잘 하라고 채찍한 셈으로 치부하며 살아왔지 않은가?

 

반살림이 지난후 스님은 이별의 채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정리 하신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가야할 길을 거부할 수는 없다. 절대적인 진리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말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세상 모든 것은 정지 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유동(流動)한다. 유동하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짧은 안목으로 보면 지구라는 땅덩이는 가만히 정지된 상태인듯 하지만 유동하고 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동으로 동으로 자전하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내는 굉음(轟音)을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이 듣지 못하는 것은 어인 자가당착(自家撞着)인가?만물은 유동 함으로써 시시로 변화한다. 변화 함으로 무상(無常)이라 한다. 만물이 변화함으로 인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아야겠다.

 

생물체가 생성 하거나 사멸(死滅)하는 작용을 반복 하지만 그 본질적인 원소는 증감이 없다는 것을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미 밝혀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설하신 것을 현대에 와서 과학자들이 증명한 것이다.

 

불생불멸 고로 곧 공(空)인 것이니 만물의 근원은 공(空)이다. 공에서 만물이 생멸을 반복한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도 예외일 순 없다. 공에서 태어났으므로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천고만고(千古萬古)의 대진리를 그 누가 역행할 수 있으랴? 그래서 제행무상은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진리이매 온 생명체는 그에 순응하는 것이요 순응 함으로써 비록 생멸을 반복하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는 “생명(生命)은 무한(無限)하다” 고 설해 있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함을 보고 생명이 태어났느니 생명이 죽었느니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본 생명체는 생사에 관계 없이 영원무궁(永遠無窮)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되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요 죽되 생명체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불생불멸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태어나고 죽는 것인가? 그것은 당연이 나를 끌고 다니는 환신(幻身)이다. 환신은 7,80년을 살면 온갖 기관이 낡아지므로 생명체를 더 지닐 수가 없게 된다. 그리 되면 우리는 환신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환신을 점지 받는다. 새로운 환신을 받으면 이를 태어났다고 하고 낡은 환신을 벗어 던지면 이를 죽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 하면서 내 생명체가 달라지는 법이 없으므로 ‘생명은 무한하다’고 불타(佛陀)는 설파하신 것이다.

 

이 무한생명을 향유하고 있는 천지만물을 불타는 대각(大覺)이라 설하셨다.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설하셨으니,“이 우주법계(宇宙法界)는 비로자나불(毘虜滋那佛)의 진신체(眞身體)다”고.

 

산하대지(山河大地) 일월성신(日月星辰)과 무변허공(無邊虛空), 그리고 그 안에서 숨쉬고 있는 온갖 생명체들이 그대로 비로자나불의 진신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우주법계는 곧 비로자나불이라는 말씀이다.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막론하고 이 우주법계 전체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 중생들은 누구인가?

 

바로 비로자나불의 분신(分身)이다. 중생을 여의고 비로자나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 모두가 곧 비로자나불인 것이다.어찌 중생들 뿐이랴? 산하대지 일월성신 무변허공 등 무정물(無情物) 모두도 비로자나불이다. 그래서 길 가에 나뒹구는 돌맹이나 산과 들에 자생하는 이름 없는 풀들까지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두가 비로자나불이니 말이다.

 

인곡스님은 이런 이치를 깨치신지 이미 오래였다. 제행무상의 대진리 뿐 아니라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열반적정(涅槃寂靜)까지도 이미 철견(徹見)하신 달도자(達道者)이시다. 그래서 환신(幻身)을 벗고 열반적정의 대휴헐지지(大休歇之地)에 안주(安住)할 시기가 이르렀음을 감지(感知)하고 계신 것. 그러나 평생을 나와 더불어 행주좌와(行住座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있어 고락을 함께 해온 환신(幻身)을 벗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병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사람이 유명을 달리 할 적에는 사백사병(四百四病)이 일시에 덮쳐와서 목숨을 앗아간다고 한다. 제 아무리 장사라 할지라도 사백사병이라는 업풍(業風)이 일시에 몰려오는 것은 막아내려거나 피하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三法印)을 요달한 대장부일 경우는 그 업풍의 위력이 아예 소멸 되었거나 현저히 줄어서 편안한 자세로 환신을 벗어 던질 수 있다 한다. 삼법인(三法印)은 업풍을 잠재우거나 감소 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진 비밀 무기이다.

 

수행인이 삼법인을 요달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고 누구나 수행을 계속하면 반드시 요달하게 된다. 삼법인을 얼마나 얻었느냐에 따라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힘을 얼마만큼 축척하였는가를 가늠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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