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90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시적(示寂)…<3>

큰스님은 사자를 시켜 혜암(慧庵)을 불러왔다. 혜암이 불이 나게 달려오니 큰스님은 벼루에 먹을 갈고 계셨다.

“스님 뭘 하십니까?”

“잠자코 보아.”

큰스님은 조용히 붓을 드신다.

 

示 慧庵性觀丈室

 

只此一殷事 古今傳與授

無頭亦無尾 分身千百億

 

다만 이 한가지 일을

고금에 전하여 주었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되

천백억 몸을 나투도다

 

“혜암(慧庵)이란 법호와 함께 이 전법게(佺法偈)를 주었어야 하는데 그 때는 자네 정진력(精進力)이 충실치 못하여 보류했었네. 내 이제 갈길이 멀지 않았으니 후사(後事)를 잘 부탁하네. 아무쪼록 용맹정진 하여 칠통을 타파하여 광도유정(廣度有情)하기 바라네.”

혜암은 일어나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삼배를 드리고 꿇어 앉아서 여쭌다.

“불민한 저를 이렇듯 아껴 주심에 거듭 감사 드리옵고 신명(身命)을 다하여 스님께서 바라심에 보답하겠나이다.”

“응, 그럼 됐네. 물러가게.”

큰스님은 혜암수좌에게 전법(傳法)하신 뒤 마음이 더 편안해지셨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혜암수좌가 큰 스님의 부촉(付囑)을 받은 뒤 더욱 피나게 정진하여 가야총림(伽倻叢林)의 방장(方丈)의 자리에 오르고 이어 조계종정(曹溪宗正)이 된 것은 큰스님이 열반에 드신지 30여년 뒤의 일이니 이는 큰스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밤과 낮으로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용맹정진한 결과였다.

한편 큰스님은 자리에 눕기도 하고 포단에 꼿꼿이 앉기도 하기를 반복하며 여름안거를 나고 계셨는데 발의 습진은 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큰스님은 나아야겠다는 생각을 접으신듯 약을 찾지도 않으셨다. 성은시자가 입대한 뒤 동진(東眞)수좌가 시봉하면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시는지라 그런대로 섭수하시는 것이었다. 하루는 시자 동진수좌에게 업혀 해우소(解憂所)엘 다녀오신 뒤 독백(獨白)처럼 말씀하신다.

“나는 열네살에 계(戒)를 받고 바로 백양사로 가서 강원(講院)에서 글을 배우느라 은사스님 시봉을 한번도 제대로 해드린 적이 없었다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은사스님을 시봉한 적이 없으면서 상좌들한테 시봉을 받으면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드니 내 시봉은 대강대강 하고 자네도 부지런히 화두를 챙기게.”

동진수좌는 어리둥절 하다가 겨우 이렇게 대답한다.

“스님께서 쾌차하시면 물론 선방으로 올라가 정진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남짓 지난 뒤 큰스님은 시자를 바라보시며,

“자네와 내가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기동조차 어려운 이때 자네 시봉을 받으니 참으로 좋구나.”

큰스님은 만족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맏상좌 혜암수좌는 스님에게 과분한(?) 부촉을 받은 뒤 여전히 선원에서 정진을 하고 있었는데 왜인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전법게(傳法偈)를 주신 것은 가실 때가 되었음을 알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선죽비만 울리면 이내 스님방으로 달려가서 스님의 동정을 살핀다.

“무엇 하러 자주 오는가? 자네 공부나 하게.”

“예.”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스님 곁에서 떠나지는 못했다. 동진시자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스님의 동정을 낱낱이 묻는다. 평상시와 혹 다른 점은 없으신가? 잡숫고져 하는 음식 말씀은 않시던가? 발에 쑥뜸은 계속 해드리는가? 등을 꼬치 꼬치 묻는 것이었다.

동진시자는 행자(行者)로 들어왔을 적에 혜암스님이 내 상좌 하겠다고 사중(寺中)에 얘기해 두었다가 수계할 적에 은사스님 앞으로 정했던 터라 혜암스님을 사형님으로 대하기 보다 스승님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혜암스님 말씀이라 하면 무조건 ‘예’ 하고 수긍함과 동시에 즉시에 실행에 옮긴다. 현재 시자가 된 것도 혜암사형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는데 본 바탕이 선량하고 신심도 있어서 스승님을 정성으로 시봉하고 있는 중이다. 시봉 드리기 전까지는 은사스님과의 거리가 하늘과 땅인 줄로 알았는데 큰사형님의 배려로 가까이 모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이 보다 기쁜 일은 없을 싶기만 하다.

시봉 드리기 이전에 여러 스님들에게서 은사스님의 얘기를 들었는데 헌식할 적에 까막 까치가 몰려와서 큰스님의 양어깨며 머리에까지 앉아 있다가 염불을 끝내고 헌식돌 위에 밥을 부어주면 서로가 더 먹겠다고 다투는 폼이 아수라장을 이룬다는 얘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신비롭기만 했다.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신기한 장면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매일 반복하여 연출(?)했다니 이런 신통을 우리 스님이 보여 주셨다는 것을 동진시자는 직접 목격하지 않아서 사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병환 중이신 데도 통 앓는 소리를 안내시고 주로 반듯한 자세로 앉아 계시는 시간이 많은 것을 직접 목격하자 스님의 정진력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인(工夫人)은 예사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또 평소 말씀이 적으셔서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심지어 조석공양 같은 것도 시지가 가져다 드리는 것 외에 다른 음식을 주문하는 법이 한번도 없었다. 아침은 죽이고 낮과 저녁은 밥인데 입맛이 없을 적에는 다른 음식이 잡숫고 싶으실 터인데 죽이면 죽, 밥이면 밥을 드신다. 죽은 반찬이 적어도 되지만 밥은 그래도 반찬이 입에 맞아야 밥맛이 나는 법인데 오랜 기간 병석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반찬 탓을 하신 적이 없다.

큰스님이 병마와 싸우면서도 정진을 쉬지 않고 있는 사이 시간은 흘러 어느덧 반산림이 되었다. 하안거의 반이 벌써 흐른 것이다. 선원 대중들은 큰스님이 아파 계신지 어떤지를 전혀 모른다. 습진이 심하여 해우소 출입을 시자의 등에 업혀 다니신다는 정도 외에는 일체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오월 그믐날 아침공양을 끝내면서 입승(立繩)스님이 대중에게 알리기를,

“오늘은 반산림날이니 사분정진(四分精進)은 쉬고 사시에 대적광전(大寂光殿)에서 선백(禪伯)큰스님의 법문이 있겠습니다.”

이 말에 혜암스님이 스님이 병중임을 알리려는데 죽비가 울리며 대중이 발우를 들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혜암스님은 큰일 났다 싶어 스님께 달려갔다. 대중이 법문 듣기를 원하는데 스님께서 기동도 못하신다면 어찌할까 싶어 마음이 닳았다.

죽공양을 마악 드신 뒤 혜암이 들어오는지라,

“벌써 대중공양을 마쳤는가?”

“예, 방금 마쳤습니다.”

“요즘 죽맛이 더 좋은걸 보니 아마 선량(禪糧)이 모자라는 모양일세.”

“자운(慈雲)사숙님이 주지이신데 선량이 모자라겠습니까? 원력도 대단하시고 따르는 신도도 많은 어른이십니다.”

스님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신다.

“매일 아침공양 전에 문안하니 미안하여 부담이 되네.”

“사형님에게 사제가 문안 드리는데 무슨 부담감을 가지십니까? 당연한 도리인데요.”

“그래도 나는 맘이 무거워. 오지 않아도 되는데…”

“스님 부담감을 갖지 마십시요. 저희가 주지사숙님꼐 잘해 드리면 되니까요.”

“암, 그래야지 잘 위해 드려야 되네.”

“예, 스님.”

자운스님은 사형님이신 인곡큰스님에게 조석으로 문안드린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서 차도가 있으신지 여쭙는다. 주지 소임은 바쁘기 이를데 없는데도 열심히 찾아 뵙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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