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89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시적(示寂)…<2>

마산 낙산사(馬山 洛山寺)에서 매일 통원 치료하시는 인곡스님을 찾아온 방문객이 있었다.

통영 용화사 도솔암(統營 龍華寺 兜率庵)에 계시는 효봉(曉峰)큰스님이었다.

두 분은 서로 손을 꼭 잡고 ‘형님’, ‘대사’하는 말 외에 한동한 침묵이었다.

발의 습진 때문에 행보가 불편하다는 소문을 듣고 효봉큰스님이 손수 찾아오신 것이다.

얼마 전에 동화사 금당(桐華寺 金堂)에서 아쉽게 헤어진 두 분은 낙산사에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신 것이다.

돌아보건대 신미년(辛未年·서기 1931년)에 금강산 유점사 선원에서 첫 만남이 있었고 2년 뒤 마하연선원(摩訶衍禪院)에서 두번째의 만남이 있은 이후 서로가 호형호제(呼兄呼弟)하여 마음을 허락한 사이가 되었다.

가야총림(伽倻叢林) 시절에는 효봉큰스님은 방장(方丈)으로 계셨고 인곡큰스님은 선백(禪伯)으로 계시면서 친형제 같이 지내셨으니 이런 승연(勝緣)은 실로 흔치 않은 것이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허전하고 아쉬운 인연이 불연(佛緣) 법연(法緣)으로 맺어졌으니 세상에 이 보다 더 한 인연이 또 있으랴?

앞서 상좌인 운문수좌(雲門首座)와의 이야기를 쓰다가 빠진 부분이 있어서 여기에 싣기로 한다.

인곡스님께서 운문에게 법호(法號)를 주시며 주신 전법게(傳法偈)가 있다.

 

示 雲門性柱 丈室

 

吾將昔日雲門餠

分付今日雲門子

君奉一鉢古祖餠

提接無量衆生類

 

시 운문성주 장실

 

내 옛날의 운문의 떡을 가져

오늘 운문자에 분부하노니

그대는 옛 조사의 떡을 가져

무량한 중생들은 제접 할진저

 

운문스님은 이 게송을 평생을 두고 다라니 처럼 외우고 또 외우며 정진에 힘을 쏟을 것이다.

또 원광(圓光) 수좌에게도 게문(偈文)을 내리셨으니,

 

示 圓光首座

 

莫說他人短與長

說去說來自招殃

若能閉口深藏舌

便是安身第一方

 

시 원광수좌

 

다른 이의 장단점을 말하지 말라

말이 오가면 재앙을 초래한다.

만일 입 다물고 혀를 감추면

이것이 몸 편케 하는 방법인저

 

낙산사에서 두달 가량 신병치료에 전념한 인곡스님은 3월에 접어들어 해인사로 돌아오셨다.

큰스님은 운문수좌가 맘에 걸려 그를 보기 위해 진주로 가셨다.

찬불가 문제로 말대꾸를 하던 운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헌데 운문수좌는 큰스님이 낙산사로 떠나신 직후 주지직을 내던지고 서울로 올라가고 없었다.

그도 스님께 반항한 것이 못내 죄스러워서 연화사를 떠난 것이었다.

인곡스님은 허탈감을 가까스로 이겨내면서 그 날로 해인사로 향하신 것이다.

지난 일을 모두 털어버리고 관음전 뒷방에 좌정한 큰스님은 예와 마찬가지로 선정삼매(禪定三昧)에 우유(優遊)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발의 습진이 또 다시 도져서 바깥 출입을 할 수가 없게 되니 성은시자가 해우소(解憂所)에 업고 다니게 되었다.

남의 신세 지기를 평소 싫어 하시던 큰스님이 시자의 시중이 없으면 해우소도 못가시게 되었으니 큰스님의 심경은 어떠하셨을까?

하안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성은시자는 입영통지서(入營通知書)를 받았다.

그는 스님에게 입영통지서를 보여 드린다.

“그게 무엇이냐?”

“입영통지서 입니다.”

“입영통지서가 무어냐?”

“군대에 나오라는 통지서 입니다.”

“저런….”

인곡스님도 낙담하신다.

젊은 몸이 몇 년씩 군대에 가서 살다보면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적어질 것이고 그리 되면 세속으로 환속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스님은 그게 안타까우신 것이다.

성은시자는 다음 날 아침 은사스님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산문(山門)을 로 하였다.

맏상좌인 혜암(慧庵)은 성은시자가 가게 되자 동진(東眞)을 시자로 삼았다.

작년 늦가을에 출가한 늦깎이인데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 은사스님 앞으로 계를 받게 했던 것이다.

동진사미(東眞沙彌)는 세속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본 경험(?)을 활용하여 은사스님을 정성을 다해 시봉하였다.

큰스님은 발의 습진도 습진이지만 노쇠한 몸을 가누기 조차도 어려워져서 앉고 눕는 일도 시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동진시자는 진종일 큰스님 곁에서 따나질 못했다.

하안거 시작하는 결제일에 특히 선원대중을 위해 큰스님은 법문을 하시기로 이미 내정되어 있어서 맏상좌 혜암은 가슴이 탔다.

“스님 결제법문은 꼭 하셔야 하는데요.”

“행보 하기가 불편한데 어떻게 하지?

“법당에까지 제가 업고 가겠습니다.”

“업힌 모습을 대중이 보면 혐오심이 날걸세. 법문은 그만 두기로 하세.”

“대중들이 스님 법문을 모두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법상에 못 오르시면 그냥 누우신 채로 법문해 주십시요.”

“여기서 말인가?”

“예.”

“그럼 법당으로 감세.”

어린 아이 달래듯 상좌는 설득하느라 애를 썼다.

시자의 등에 업혀 법당으로 가서 법상에 높이 앉으신 스님은 주장자를 꽉 붙잡고 마침내 입을 여신다.

“오늘이 결제(結制) 날이라 구순안거(九旬安居) 동안 대중은 금족(禁足)과 묵언(默言)으로 오직 화두(話頭)에 몰두하여 타성일편(打成一片)할 것이니라.

수행하지 않고 시은(施恩)을 녹이는 것은 업(業)만 더할 뿐이니 밤을 낮 삼아 정진에 채찍을 더할지니라.

산승이 젊어서 이 후 무자화두(無字話頭)와 더불어 평생을 살아왔나니 여러분에게도 무자화(無字話)를 권해 왔느니라.

무자화를 드는 이는 이 무(無)라는 말씀이 유무(有無)의 무(無)인가? 진무(眞無)의 무(無)인가? 하며 사량복탁(思量卜度) 하지 말고 다만 ‘어째서 무(無)인고?’ 하고 의심해 갈지니라.

어떤 중이 여쭙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니 조주(趙州)선사 이르시되, ‘무(無)니라’라고 답했소.

 

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에 의심하되, ‘준동함령(蠢動含靈)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하셨거늘 조주스님은 어째서 무(無)라고 하셨는고?’ 하고 의심해 갈지니라.

조주(趙州)는 인삼도무(因甚道無)오? 하고 참구해 나가면 의심덩이가 하늘과 땅에 가득하여질 것이니 그런 경지에 이르거든 이 노승(老僧)을 찾아와서 진로를 물을 것이니라.

대중이여 무상(無常)이 신속하여 내 이제 환신(幻身)을 벗을 시기에 가까웠느니라 물을 것이 있거든 속히 물을지어다.”

띄엄 띄엄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지만 스님의 그 말씀 속에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에 굳은 신념이 있었다.

한동안 양구(良久)하신 후 읊으시기를,

 

風動心搖樹하고

雲生性起塵이라

若明今日事인댄

昧却本來人이니라

 

바람이 동하니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나니 성품이 티끌을 일으키도다.

만일에 오늘 일을 밝히려 할진대

본래의 사람들을 어둡게 하리라.

 

큰스님의 공식적인 법문은 이 결제 법문이 마지막 법문이 될지도 모른다.

큰스님은 자신의 환신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음을 스스로 감지(感知)하고 계시는듯 했다.

예전에 오대산 상원사선원(五台山 上院寺禪院)에서 안거 하면서 조실이신 한암(漢岩)큰스님께서,

“평소 부처와 조사스님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야 뭐 그리 대단한가?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에 어떻게 가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말씀을 큰스님은 실감(實感)하고 계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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