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88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시적(示寂)…<1>

연화사에서 동안거를 마친 것은 경자년(庚子年·서기 1960년)의 이른 봄이었다. 새봄이 완연한 3월 3일에 응성사(凝石寺)에서 개금불사(改金佛事) 점안법회(點眼法會)의 증명(證明)으로 초빙을 해왔다. 응석사를 다녀오자 이번에는 옥천사(玉泉寺)에서 팔상탱화(八相幀畵) 점안식(點眼式)에 증명으로 모시겠다는 기별이 왔다. 증명에는 효봉(曉峰)스님과 두분을 모셨으므로 인곡스님은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해 하셨다.

상좌 운문주지는 대중 외호를 하는 틈틈이 어린이 법회를 이끄는 한편 스승님을 기리는 ‘우리스님’이라는 노래를 지어 신도들에게 가르쳤다. ‘우리스님’의 가사를 음미해 보자.

 

십세미만 천전한 동진시절에

따뜻하신 부모품을 떠나옵시사.

부처님의 계율과 진리 속에서

한평생을 한결같이 보내시었네.

 

사람마다 좋아하는 세상락에는

추호라도 마음두지 않으시옵고

푸른숲과 맑은 시내 찾아가시자

한평생을 낡은옷에 깃드시었네

 

간곳마다 많은제자 거느리시고

자재로이 님의 법을 드날리시자

역대조사 마음등불 전하심으로

한평생을 한평생을 몸바치셨네.

 

이 노래는 상좌인 운문(雲門)스님이 짓고 추월성(秋月星)거사가 작곡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널리 퍼져 나갔다.

여기 연화사에 계시는 동안에도 스님은 지병인 습진이 더 심해져서 무지 고생을 하셨다. 시자 성은(性恩)이 매일 스님을 업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곤 하셨다. 연화사에서 가까운 곳에도 병원이 있었지만 남강 건너 진주역 근처에 용한 의사가 있어서 성은시자는 1㎞도 더 되는 거리를 매일 업고 다녔다. 그 당시 형편으로 택시를 탈 생각은 아예 내본 적이 없이 성은시자 등에 업혀 스님은 병원엘 왕래하신 것이다.

어느날 성은시자는 스님을 업고 몇차례 쉬었다가 가곤 하여 남강 다리에 이르러 스님을 내려 드리고 쉬면서 대뜸 독백처럼 하는 말이,

“스님, 다른 큰스님들은 신도와 상좌들이 자동차를 이용하여 자기 스님에게 문안(問安)드리고 모시고 나다니는데 우리는 어찌 이렇게 복이 없습니까?”

이에 스님은 담담한 어조로,

“이것이 복이니라”

“예…?”

성은시자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스승님을 치료하기 위해 업고 다니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 병이 나신 스승이 상좌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왕래하는 복(福). 성은시자는 아직 그 뜻을 완전히 해득하지 못했지만 스승님의 담담한 어조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복(福)이란 무엇인가? 재산 많이 갖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만이 복이 아니다. 부자는 부자 대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대로, 잘난 이는 잘난 대로, 못난 이는 못난대로, 인간이 천자만별의 생활을 영위해 가는 그대로가 모두 복인것이다. 천만원 가진 사람은 천만원 복이요 오백만원 가진 사람은 오백만원 복이다. 재산이 많은 것만이 복이 아니라 적은 재산도 복인 것이다.

걸인 부자(父子)가 아침에 한술 밥을 얻고져 다리밑 자기집(?)에서 마을 쪽으로 가는데 마침 마을의 한 집에 불이 났다.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저기 불이 났네요.”

“그렇구나.”

“집이 다 타버리면 살림살이도 다 타버릴 텐데 어쩌지요?”

“어쩌긴 어째? 알거지 되는거지. 우리는 그런 걱정이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다 네 아비 덕인줄 알아라.”

“예……?”

아예 집이 없으니 불날 일도 없는 이 복은 네 아비가 집이 없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니 내 덕이 아니냐 말이다.

복이란 반드시 물질에 있는 것만은 아닌 법. 마음 편하면 대복(大福)인 것이다. 말세에 불법(佛法)을 만나 수행하는 복은 얼마짜리나 되는가? 성은시자가 만일 은사스님을 일찍 여의었다면 손수 업고 병원에 갈 수 있을까? 은사스님이 계시기에 효행(孝行)을 하게 되었으니 이 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는가? 스승님을 시봉할 수 있는 청복(淸福)을 어느 누구나 다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은시자는 정말 복을 지닌 사람이다. 헌데 성은시자는 그런 청복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외형적인 물질적인 복만을 아는 애숭이인 모양이다.

상좌 운문(雲門)이 찬불가 짓는답시고 마치 시인이 시상(詩想)에 잠기듯 책상 앞에 꿇어 앉은 모습을 인곡스님은 여러차례 목격하셨다. 또 어린이들에게 불심을 심어준답시고 매일 어린이들과 노는 모습도 여러 차례 보아 오신 큰스님은 마침내 운문을 부르셨다.

“자네가 중이 되었으면 참선을 하던지 간경(看經)이나 염불을 해야지 노래나 짓고 아이들이나 돌보아서야 되겠는가?”

이에 운문은 이해해 주시지 않는 스님이 원망스런 생각이 들어 대뜸 여쭙기를,

“스님께서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찬불가 짓고 어린이 법회 합니다. 설사 부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셔도 저는 이거 해야겠습니다. 찬불가 짓다가 지옥에 갈지라도 저는 이거 하겠습니다.”

여지껏 스승에게 대꾸 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 상좌가 당당하게(?) 대드는 것에 적이 놀란 스님은,

“나가거라. 내 앞에서 썩 물러나.”

“예 나가겠습니다.”

운문은 벌떡 일어 나가버린다. 여느 때 같으면 스님에게서 물러날 적에 스님께 이마를 땅에 대고 예배를 드린 다음 공손히 일어나서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법인데 운문수좌는 그런 예절을 무시하고 벌떡 일어나 그냥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운문은 단지 스님께서 이해해 주시지 않는 것만 서운했지 예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아! 그런데 이를 어쩌랴? 이 일이 두고 두고 평생을 후회하여도 씻지 못할 불효(不孝)였던 것을.

운문수좌는 스님에게 대들만큼 찬불가에 대한 애착과 신념이 철저했다. 그 뒤 스승님에게 죄스러운 맘이 앞서 다시는 뵙지 못하였으니 이 역시 후회하여도 씻을 길 없는 아픔으로 남았다. 방생비(放生費) 3만원을 맡기셨는데 찬불가 제작비에 써버리고 갚아 드리지 못한채 스님과 영영 이별한 것도 가슴에 못으로 남아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아야 했다.

운문이 자리를 발차고 나간 뒤 큰스님 역시 마음이 상하여 그냥 눌러 있을 마음이 없었다. 큰스님은 혼자서 걸망을 챙겼다. 시자를 불러 이르신다.

“마산에 용한 의원이 있다 하니 그리고 가자꾸나.”

성은 시자는 두 말 없이 두루마기를 입고 주지실로 갔다. 여비를 얻기 위해서다. 헌데 마침 운문주지는 외출하고 없었다. 여비를 마련한 길이 없자 큰스님에게로 가서 여쭌다.

“스님 조금만 기다리셔야 되겠습니다. 주지스님이 출타하고 안계시든거요.”

“여비 때문에 그러느냐?”

“예, 스님.”

“내게 기차삯은 있으니 어서 가자.”

큰스님도 운문이 보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다. 진주역 까지 걸어서 기차에 몸을 싣고 진주를 뒤로 하시는 큰스님의 표정은 문자 그대로 ‘무표정’ 그 것이었다. 찬불가 관계로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온 운문은 스님이 떠나신 것을 보고 왈칵 눈물이 았다. 스님께 불손하게 대든 것이 못내 죄송하고 후회되었다.

마산역에 내려 몇발자욱 걷다 말고 성은시자는 스님의 옷보따리 하나를 놓고 내린 것을 깨닫고 스님을 뒤로 한 채 역으로 뛰어갔다. 기차가 이미 떠났음을 확인하고 다시 뛰어 스님에게 돌아와서,

“옷보따리 하나를 놓고 내렸어요.”

그래서 뛰어 갔음을 여쭌 것이다.

“두고 내린 보따리는 제 주인을 찾아 갔느니라.”

담담히 이렇게 이르시고 낙산사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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