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87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정화운동(淨化運動)…<4>

여기에서 잠시 스님이 아끼시던 혜적(慧寂)의 소식을 적어야겠다. 전에도 몇번 소개한 바 있었지만 혜적은 대구(大邱)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해인사에서 인곡스님의 상좌가 되었으며 중이 되어서는 줄곧 인곡스님을 시봉하며 틈틈히 삼장(三藏)도 펼쳐보고 또 참선에도 열심히 정진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는 속가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며 할아버지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운 천재여서 경전과 조사어록도 모두 혼자서 보았다. 학문에만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리판단에도 남보다 앞서는 인물이어서 인곡스님은 그를 매우 아끼셨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다. 계사년(癸巳年) 동안거 때 통도사 대웅전에서 연지(燃指)하였는데 그 당시의 일로 치명적으로 건강을 잃은듯 하다. 결핵을 앓고 있는데다 위장병까지 얻어 스님 시봉도 못하고 부산으로 마산으로 진주로 다니면서 신병치료에 애를 썼지만 무술년(戊戌年) 여름에 연화사에서 연화세계(蓮華世界)로 먼저 떠나고야 말았다.

떠나기 일주일 전에 법화경(法華經)을 진종일 읽더란다. 함께 지내던 대중이 왜 진종일 읽느냐고 물으니,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잡담할 시간이 없소.” 하고는 계속 읽더란다..아니 읽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 7권을 달달 외우더란다.

이튿날도 혜적스님은 법화경을 놓지 않고 읽었는데 공양시간 예불시간은 여전히 잘 지키고 얼굴 표정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한다. 가기 전날 점심공양 중에 숭늉을 기다리면서 갑자기,

“그렇지, 유차일사실(唯此一事實)이요 여이즉비진(餘二則非眞)이지…”

“뭐가 말입니까?”

“세출세간(世出世間)의 모든 이치가 그렇단 말입니다.”

“……”

그날밤을 지내고 이튿날 새벽에 예불시간인데도 방안에 불이 켜지지 않아서 시봉하던 노보살님이 날이 밝자마자 노크를 하고 들어가 보니 한쪽 발을 이불 밖으로 내놓은 채 깊은 잠에 들어 있어서 스님 스님 하고 부르니 대답이 없더란다. 다시 불러도 대답이 없어 대중스님들에게 알리자 너댓명의 스님들이 달려가보니 이미 연화세계로 떠나고 환신(幻身)만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 대중이 정중히 다비(茶毘)하여 뼈가루는 청국사(淸國寺) 뒷켠 골짜기에 염불하며 뿌려 주었다.

이 사실을 인곡스님의 맏상좌들이 스님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그래서 옥천사로 가기 전에 연화사에 잠시 묵고 있을 적에도 말씀 드리지 않았고 그 뒤로도 말씀 드리지 않았는데 해인사로 돌아오신 뒤 혜적의 입적소식을 알려 드렸더니 사흘을 공양 드시지 않았다 한다.

각설하고, 백련암선원(白蓮庵禪院)의 여름안거는 조용한 가운데 아무 탈 없이 잘 났다. 고암스님이 연화사에서 의곡사(義谷寺)로 옮겨가서 주지 석정(石鼎)스님에게 붙들려 주저앉게 되니 인곡스님과의 언약이 실현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해제 후 대중들은 또 걸망을 메고 철새로 돌아가니 큰방에는 조실스님과 원주 시자 등 세사람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실스님은 적적해 하거나 외로워 하는 법이 없이 늘 묵묵히 앉아 참선하는 것으로 족함을 삼았다. 새로 중이된 사미 세사람에게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가르치는 재미도 짭짤했고 가끔 식구들끼리 직접 두부를 만들어 먹는 것도 여간 즐겁지 않았다.

그런데 가을이 깊어가면서 조실스님은 공양을 거르는 일이 잦아졌다. ‘입맛이 없으니 안먹겠다’고 하신다. 원주스님은 콩죽을 쑤어 드리기도 하고 진주에 나가서 탕약도 지어다 드렸지만 워낙 남의 신세 지기를 꺼리시는 성품이신지라 탕약도 마다 하시고 죽도 쑤지 말라 하신다.

원주스님은 걱정이 되어 해인사에 있는 맏상좌인 혜암(慧庵)스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실스님이 신양(身恙)으로 고생하시니 상좌스님들이 오셔서 간병(看病)하십시요.’ 하는 내용의 사연을 띄운 것이다. 그래서 결제(結制) 무렵에 혜암 운문(雲門) 법종(法宗) 등이 찾아와서 스님을 모시고 지내게 되었는데 운문은 당시 대구 관음사(觀音寺)를 맡고 있어서 결제 법문만 듣고 대구로 돌아갔다.

법종은 형제간이 중이되었는데 형은 범어사 동산(東山)조실스님의 상좌가 되고 법종은 인곡조실스님의 상좌가 되었으니 속가로도 형제간이요 절집에서도 사촌사형제지간이 되었다. 법종이 결제 때부터 조실스님의 시자가 되어 스님 간호에 전심전력 하더니 조실스님이 차츰 깨어나셨다. 죽도 잘 드시고 탕약도 거절 않으신 덕으로 회복이 빨리 되신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 해(기해년) 봄에 스님은 시자를 시켜 걸망을 챙기라 이르신다. 효봉(曉峰)스님께서 동화사 금당(桐華寺 金堂)으로 오라시는 편지를 보내신 것이다. 효봉스님의 서찰을 받자 스님은 뛸 듯이 기뻣다. 신미년(辛未年)에 금강산 유점사 선원(楡岾寺 禪院)에서 함께 안거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 까지 서로가 눈 한번 흘긴 적이 없이 아끼고 위하고 존경하며 살아온 사이기에 기쁨이 넘치는 것이리라. 인곡스님을 모시고 갈 시자로는 고암스님의 상좌 원철(圓徹)과 봉우(鳳愚)였다.

효봉스님과 인곡스님과 만남은 그저 아는 스님끼리의 만남이 아니라 한산(寒山)·습득(拾得)의 만남이요, 원효(元曉)<0A24D>의상(義相)의 만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로 호형호제 하리만큼 서로가 상대를 알아주는 사이인 것이다.

스님은 백련암에서 진주로 나와 대구행 버스를 탔다. 대구시내의 관음사(觀音寺)에 있는 상좌 운문(雲門)을 보고져 함이었다. 뜻밖에 스승님을 모시게 된 운문은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여기서 뭘 하느냐?”

상좌의 생활이 궁금하신 모양이다.

“신도법회 외에 어린이를 위한 법회를 신설했습니다.”

“어린이법회라?”

“예, 어린 새싹들한테 불심을 심어 줘야만 확실한 신도가 되지요.”

“그리고 또?”

“음악을 통한 포교도 중요한 것 같아서 틈틈히 불교음악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찬불가(讚佛歌)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일에 시간을 쏟고 나면 자네 공부는 언제 하는고?”

“제가 하는 일 모두가 제게는 화두입니다.”

“음∼ 잘 모르겠구만.”

스님은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어 운문에게 주신다.

“이 돈은 방생비(放生費)일세. 자네가 맡아서 잘 간직해 두게. 내가 필요할 때 달라고 함세.”

“예 스님.”

스님이 주신 돈은 3만원이었다. 스님이 동화사로 올라가신 뒤 운문은 찬불가 작곡에 여념이 없었는데 돈이 궁하여 스님이 맡기신 돈을 작곡사업(?)에다 쓰고 말았다.

“방생불사나 찬불가, 작곡불사나 매 한가지 불사(佛事)이니 헛되이 쓴 것이 아니잖은가?”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리며 쓴 것이다.

동화사에서 하안거를 나고 초가을이 되자 운문이 스님을 모시러 왔다.

“제가 스님을 모시기 위해 진주 연화사로 옮겼습니다. 관음사는 기본신도가 없어서 차고 배고픈 절이었습니다.”

상좌가 모시겠다는데 마다할 명분이 없어 효봉스님과 헤어지기로 했다.

“그래 그래, 잘했어 상좌가 제일이야.”

효봉스님도 흔연히 동의해 주시는 것이었다.

“방장스님 건강히 오래 오래 사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다시 찾아 뵙지요.”

“맞소 맞소, 스님도 건강을 챙겨야 합니다.”

이렇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인곡스님은 연화사로 오셨다.

연화사에 인곡스님이 조실로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옥천사 백련암 대중이 다섯분이나 와서 제법 선원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상주대중이 십여명이나 되자 주지 운문스님은 선량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스승님을 모신다는 기쁨이 가슴을 가득 메워서 고된 줄 모르고 매일 뛰고 또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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