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86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정화운동(淨化運動)…<3>

당시 전북종무원장인 매곡(梅谷)스님을 하야(下野)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동산(東山)스님의 법력(法力)의 힘이었다고 하겠다. 청정본연(淸淨本然)하거니 운하홀생하대지(云何忽生河大地)이어뇨? 하고 매곡스님을 다그친 법력.

여기에 매곡스님이 젊어서 이 후로 선원을 넘나들며 선수행(禪修行)을 통해 한 경지를 얻지 못했다면 동산스님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자존심이랄까 아만심이 발동하여 자기 명예와 위치를 지키기 위해 반항했을 것이다.

매곡스님 사건은 결국 동산 인곡 매곡의 삼도인(三道人)이 엮어낸 멋진 ‘도인들의 드라마’였던 것이다.

을미년(乙未年·서기 1955년)8월에 양측 합의로 조계종권(曹溪宗權)이 비구승측으로 넘어오자 서울에 운집한 비구승 모두는 사찰 주지로 나가게 되었다.

인곡스님은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 주지로 내정되었으나 본인이 한사코 사양하고 해인사(海印寺)로 내려와서 예전처럼 정진생활을 계속 하였다.

대본산(大本山)은 가급적 권속이 있는 큰스님을 주지로 임명해야만 절에 남아있는 대처승과의 힘겨루기에 있어 이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절을 운영하는데에도 권속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 했다.

총무원장(總務院長)인 청담(靑潭)스님은 사람을 해인사로 보내어 끈질기게 인곡스님에게 졸라댔다. 그래서 병신년(丙申年) 봄에 인곡스님은 상좌들을 데리고 화엄사로 자리를 옮겼다.

인곡스님의 도성(道聲)을 익히 들어온 사판스님들은 별 저항이나 반대 없이 인곡스님을 주지스님으로 받아들였다. 인곡스님은 주지라는 이름만 띄고 수진(守眞)스님이 사중 일을 도맡아 보았는데 사판스님들은 큰절을 비워 주고 구층암(九層庵)으로 올라가서 살면서 사사건건 공격하고 물고 늘어지기 일쑤였다.

서로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우아랫절에 살기로 했지만 그들이 음으로 양으로 시비를 걸고 나서는지라 이런 생활에 익숙치 못한 수좌들은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었다. 소임을 맡은 상좌들은 사판스님들과 두 세번 입씨름을 하고 나면 몰래 걸망을 메고 달아나 버린다. 거기에 주지대리인 수진스님도 견디다 못해 걸망을 쌌다.

“스님 해인사로 다시 가십시다. 사판승들과 날마다 시비를 벌이면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

인곡스님은 묵묵부답이었다. 주지직을 맡긴 총무원장에게 사표를 내야 하는데 후임 주지감이 없는 이 마당에 무어라 말하고 사표를 내느냐 말이다.

수진스님은 스승님이 묵묵부답 하시는 의중을 십분 헤아리고 있지만 오랜 수좌생활에 젖어온 탓으로 더는 견딜 힘이 없어 결국 그도 대중 몰래 걸망을 쌌다.

병신년이 지나고 정유년(丁酉年)이 되자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보살계산림(菩薩戒山林)을 하는데 인곡스님을 갈마아사리(갈摩阿奢梨)로 청하였다. 전계화상(傳戒和尙)은 동산스님이고 교수(敎授)화상은 고암(古庵)스님이어서 공교롭게도 삼화상(三和尙) 모두가 용성(龍城)큰스님의 제자로 짜여졌다.

인곡스님은 기꺼이 선학원으로 향했다. 서울간 김에 총무원장을 만나 주지직을 내놓을 작정이었다. 선학원에서의 보살계산림은 전무후무한 대성황을 이루었다. 정화운동을 사실상 주도했던 동산스님이 종정직(宗正職)을 내놓고 범어사로 내려간 것을 못내 아쉬워하던 신도들이 대거 운집하였던 것이다.

정화운동 초기부터 동산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된 것은 정화운동을 동산스님이 주도했기 때문인데 을미년 8월 12일 비구승측으로 종권이 넘어오자 청담스님은 종정을 새로 선출하자 하여 젊은 수좌들을 규합, 새 종정에 석설우(薛石牛)스님을 추대하는데 성공했다. 만일 동산스님을 그대로 종정으로 모신다면 종권 행사에서 일일이 간섭을 받아야 했으므로 석우스님으로 바꾼 것이었다.

사실 석우스님은 정화운동에 전혀 가담하거나 협조하지 않고 팔공산 동화사(八公山 桐華寺)에 숨어 계셨던 것이다. 서울 신도들은 석우스님의 존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동산스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하신 것을 그들은 두 눈으로 똑똑이 보아 왔으므로 종정 자리는 의례히 동산스님이 앉으실 것으로 여겼는데 청담스님의 농간으로 석우스님으로 바뀌자 크게 반발했던 것이다.

아무튼 동산스님이 범어사로 내려간 뒤 신도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조계사에서는 조석공양을 해결하는데에도 쩔쩔 맸으며 총무원 사무실을 운영할 재력이 없어 모진 고생을 해오고 있었다.

각설하고 인곡스님은 총무원장을 직접 찾아가서 화엄사 주지직을 사임했다.

“조금만 더 참으시면 괜찮아질텐데요.”

청담스님의 종용이 끈질겼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으니 하는 수 없습니다.”

주지직을 내놓은 인곡스님은 부산 금정사(金井寺)로 내려갔다. 온천욕으로 지병인 습진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기를 자주 하면 습진이 수그러든다.

여기에서 봄 여름을 나고 가을에 접어들자 성주사(聖住寺)에서 스님을 모시러 왔다. 고암(古庵)스님이 거기에 계셨던 것이다. 성주사는 비록 총림개설은 깨어졌지만 선방은 그대로 운영해 왔으므로 인곡스님을 조실로 모신 것이다.

성주사에서 겨울안거를 나고 무술년(戊戌年) 봄에 인곡스님은 진주를 거쳐 고성 옥천사(固城 玉泉寺)의 백련암(白蓮庵)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련암에서 조실로 모신 것이다.

고암스님은 진주 연화사(晋州 蓮華寺)에 남아서 하안거(夏安居)때 뒤따라 오기로 언약했다. 스님이 옥천사로 갈 적에는 스님을 모시는 시자도 없었다. 시봉하던 혜적(慧寂)수좌가 성주사에서 위장병으로 고생하더니 치료하기 위해 부산으로 떠난 뒤 스님은 진주로 옮겼던 것이다.

고암스님과 연화사에서 헤어질 적에 두 스님의 가슴은 쓰리고 아팠다. 선량(禪糧)이 없어 헤어져야 하는 현실이 두분 마음을 상하게한 것이다. 인곡스님과 고암스님은 친사형사제 이기도 하려니와 서로 의기상합(意氣相合)한 도반이었다.

옥천사 백련암 상오(尙悟)수좌가 원주(院主)인데 큰절에서 중이 되어 백련암과 큰절을 오가며 옥천사 일주문 밖을 나가보지 않은 알짜배기 수좌이다. 인곡스님을 조실로 모신 것은 큰절 주지인 동고(東皐)스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동고주지는 옥천사 출신 스님들 중 몇분 안되는 청정비구의 한분으로서 일찍이 큰절에서 강주(講主)로 오래 있었고 주지직도 이번이 세번째라 한다. 사리에 밝고 신심이 대단하며 참선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온 숨은 본분납자(本分衲子)인데 특히 인곡스님이 헌식할 적에 까막 까치가 스님의 양어깨에 앉아 있는 모습에 천진도인(天眞道人)임을 간파하고 내심 존경심을 가져왔다 한다. 까막 까치의 기적은 백련암에서도 여전히 매일 낮에 볼 수 있는 장면이어서 동고주지는 이 광경을 보기 위해 큰절에서 점심공양을 하지 않고 백련암에서 들곤 하는 것이었다.

동고주지는 대중들에게,

“내 일찍이 신승전(神僧傳)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산짐승 날짐승들이 늘 에워싸고 따라다니는 기적을 연출한 도인들 이야기가 있더구나. 인곡스님은 정말 현세의 천진도인이시다. 내 눈앞에 도인스님이 계신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들 모두는 업장이 두꺼운 바보 천치가 아니냐!”

인곡스님이 괘석(掛錫)한 뒤 진주(晋州)에서 신도들의 왕래가 차츰 잦아졌다.

헌식(獻食)하는 기적같은 장면을 직접 보기 위해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원주스님은 선량 얻기가 쉬워진 것은 물론이고 큰스님을 모셨다는 기쁨이 여간 크지 않았다.

음력 3월에 행자(行者)세사람이 인곡조실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수계사(授戒師)이신 조실스님이 법명을 지어 주셨는데 지성(知性) 봉래(鳳來) 봉우(鳳愚)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 지성사미(知性沙彌)는 조실스님의 시자(侍者)를 맡았고 봉래 봉우는 공양주와 채공 소임을 계속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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