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49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선심일여(禪心一如)…<6>

각진국사(覺眞國師).


 고려 원종(高麗 元宗) 11년 9월 15일에 경남 고성(古城)에서 태어난 스님은 천자(天資)가 총민(聰敏)․명랑(明朗)하여 진세(塵世)의 범류(凡類)가 아니었다. 10세에 조계산(曹溪山) 원오천영국사(圓悟天英國師)에게 나아가서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런 뒤 얼마 안 있어 원오국사가 시적(示寂)하시면서 대선사도영(大禪師道英)에게 의지하라고 유촉(遺囑)하시자 도영선사를 섬기기 10여년이나 하였다.


 충렬왕 16년(1290년) 21세의 나이로 선선상상과(禪選上上科)에 급제한 스님은 천석(泉石)에 관심(觀心)하고 운림(雲林)에 소용하며 명리(名利)를 멀리하였다. 수선사(修禪社)의 제12대 조사인 자각국사(慈覺國師)는 스님의 두 번째 스승이시니 일찍이 수선사 대중을 스님에게 맡기고져 하시매 스님은 고사(固辭)하고 장성(長城) 백암사(白岩寺)로 가서 운문선원을 창건 동지들과 주야로 참구(參究)하기를 10여년이나 하였다.


 그 뒤 강진(康津) 땅 월남사(月南寺)와 조계산 수선사에 머물기를 40여년이나 하였으니 이 때 복국이생(福國利生)함이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만년에는 나라에 표(表)를 올려 윤허를 얻어서 영광군(靈光郡) 불갑사(佛甲寺)에 괘석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년)에 공민왕이 스님을 왕사(王師)로 책봉(冊封)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공민왕 4년(1355년)7월 27일에  시적(示寂)하시었는데 몇일전에 국왕과 재부(宰府)에 글을 올려 하직하고 목욕하시고 새옷으로 갈아 입으신뒤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기를,


 卽心卽佛은 江西老요

 非佛非心은 物外翁이로다

   선聲中에 吾獨往하노니

 涅槃生死가 本來空이로다


 곧 마음이 곧 부처라 함은 강서 늙은이(馬祖)시고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라 함이 물외옹(각진국사)이로다

 박쥐 우는 소리 속에 내 홀로 가노니

 열반과 생사가 본래 공(空)이로다.


 이렇게 임종게를 읊으시고 천화(遷化)하시니 춘추는 86세시고 나라에서 각진국사(覺眞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스님의 법명은 복구(復仇)이고 스스로 무언수(無言叟)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스님의 문하에 천여명의 제자를 두었으며 생질(甥姪)인 졸암 연온(拙庵 衍溫)이 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또 졸암스님의 생질인 구곡각운(龜谷覺雲)이 외숙인 졸암스님의 법을 이었다.


 인곡조실은 각진국사께서 창건한 운문선원의 조실이 되었는데 조실의 외숙이신 만암주지(曼庵住持)스님에 의해 출가하여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수학하였으니 스승님임에 틀림이 없다. 각진국사와 졸암스님의 기연(奇緣)이 재현된 것 같아서 인곡조실은 각진국사를 자주 떠올리곤 하였다.


 인곡조실은 운문선원에서 3년을 주석하면서 어떤 때는 땔나무도 하고 어떤 때에는 큰절에서 선량(禪糧)을 져나르기도 하였다.


 해제하고 나면 본방대중 외의 납승들은 거의가 행각에 나선다. 본방대중은 노덕스님 너댓분이 고작인데 땔나무가 떨어지기 일쑤여서 조실이 직접 화목(火木)을 해 나른다. 물론 노덕스님네도 운력에 동참하지만 능률이 안 오른다.


 더욱이 큰절에서 선량을 얻어오는 일은 노덕스님네가 할 수 없으므로 큰절은 노덕스님네가 할 수 없으므로 큰절부목님과 인곡조실이 져나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역경을 인곡조실은 전혀 마다하지 않고 운력에 먼저 앞장선다.


 성인(聖人)도 여세출(如世出)이라고 하지 않던가! 더욱이 백양사는 인곡조실의 출가본사인만큼 무슨 일이고 닥치는 대로 솔선하여 해내는 것이 자기 분수인 것이었다. 그래서 인곡조실은 운문선원의 생활이 고행(苦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인곡조실은 통도사 극락선원(極樂禪院)에서 혜월조실(慧月祖室)에게 배우고 익힌 경험을 여기에서 활용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백장(百丈)선사는 늙은 몸을 무릅쓰고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공양을 들지 않으셨으니 그에 비하면 땔나무하고 선량 나르는 일은 일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인곡조실은 포단에 앉아서나 포행을 하거나 땔나무를 하거나 간에 화두를 놓아본 적이 없다.


 화두를 드는 상태에서 지게를 지면 지게지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니 일용사(日用事) 모두가 그대로 화두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을 하되 고된 줄을 모르고 일에 열중한다.


 혜월조실이 진종일 논을 치느라 괭이질, 삽질을 했건만 ‘어떠십니까?’ 하고 여쭐적이면 ‘성성(惺惺)이여!’ 하고 대답하신 것을 그 당시 인곡조실도 체험했던 것이다. 이렇게 선정삼매(禪定三昧) 중에 종일 길을 걷되 일찍이 걸은 적이 없으며 종일 땔나무를 하되 일찍이 포단 위를 떠나지 않았는지라 고된 줄을 몰랐던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을 보자.


 세존(世尊)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를 떠나지 않으시고 천상(天上)의 여러곳을 오르신 법문이 나온다. 이 역시 세존이 삼매 중에 계시면서 찬상을 오르셨으니 앉아 계신 본래의 자리인 보리수 아래를 여의신 적이 없으신 것이다.


 삼매 중에 행주좌와(行住坐臥)․어묵동정(語黙動靜)하되 거리에 주착(主着)하거나 이끌리지 않으니 일찍이 행주좌와․어묵동정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인곡조실은 삼조승찬(三祖僧燦)선사의 신심명(信心銘)과 영가진각(永嘉眞覺)선사의 증도가(證道歌)를 좋아하여 매일 암송하여 오고 있다.


 옛날 강원(講院) 시절에 조사(祖師)스님네의 가송(歌頌)을 베껴서 외우는 풍조에 따라 학인들을 자기가 좋아하는 풍조에 따라 학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송을 붓으로 베껴 걸망에 넣어 두고는 그걸 몇 구절씩 따로 베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산책 중에 꺼내 외우곤 하였다.


 인곡조실은 위의 신심명․증도가 외에 나옹(儺翁)선사의 가송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이 가송은 그냥 가송이 아니라 탈속(脫俗)한 맛에 흥얼거림 같은 정감(情感)이 넘쳐흐른다. 나옹선사의 가송은 그냥 흥얼거림의 정감이 아니라 가송 안에 가득 배여 있는 초탈(超脫)한 선지에서 우러나는 흥얼거림인 것이다.

 저 국청사(國淸寺)의 한산(寒疝)․습득(拾得)이 부엌데기 노릇하여 얻은 누룽지나 수쳇구멍에 받쳐 놓은 대바구니에 고인 설걷이 찌꺼기를 얻어 끓여 먹으면서도 그 둘이는 춤을 덩실덩실 추며 노래를 하고 박장대소하였으니 그분네의 시가(詩歌)에는 세속적인 정감이나 흥얼거림이 추호도 없지 않던가!

 나옹선사의 가송을 인곡조실이 좋아하는 것도 세속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탈속한 멋이 넘쳐흐르기 때문이었다.

 또 좋아한 가송을 꼽는다면 당연히 한산시(寒山詩)이다. 뚝섬 봉은사(奉恩寺)에서 개간(開刊)한 삼은시집(三隱詩集)을 강원시절에 얻었는데 여지껏 걸망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으며 이따금씩 흐리기 때문이다.

 인곡조실은 월래 과묵(寡黙)한 성품이지만 인정이 남에 못지 않게 많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래서 인곡조실을 무뚝뚝하다고들 하지만 이는 인곡조실을 정확히 보지 못한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뱁새가 황새걸음을 어찌 알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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