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85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정화운동(淨化運動)…<2>

제1차대표자 대회에서 비구승단(比丘僧團)을 탄생시킬 목적으로 종헌제정위원(宗憲制定委員) 9명을 뽑았는데 인곡스님은 두 기구의 위원으로 뽑혀 명실상부한 비구승대회의 핵심이 되었다.

도량이 비좁은 선학원에 3백여명의 납자들이 모였으니 얼마나 불편 했을까마는 누구 하나 짜증을 부리지 않은 것은 이 대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은 해방 직후 사판승측 인사들이 먼저 일으켰는데 해인사(海印寺) 최범술(崔凡述)이 당시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이었는데 이대통령(李大統領)에게 공산주의자들이 불교계에 침투하여 중앙총무원(中央總務院)을 접수하는 등 난동을 부린다고 알려서 정화운동에 가담한 승려 전원이 체포 당함으로써 자체정화가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전국 비구승(比丘僧)이 궐기한 것은 현재 종권(宗權)을 장악하고 있는 소위 사판승(事辦僧)들이 수행승(修行僧)들을 철저히 외면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판승은 거의가 처자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외모로는 승려이고 안으로는 속인과 다름 없으니 수행승과는 자연히 맞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중이다’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중노릇 잘하는 수행승을 외호할 줄 알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질 못했던 것이다.

승려가 처자를 거느리는 것은 우리 전통불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장악하면서 일본식 불교로 바꾸기 위해 대처를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또 권장한 것이다.

그래서 비구승측은 왜색불교(倭色佛敎)를 청산하고 전통불교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궐기한 것이다.

선학원(禪學院)에서 여러 차례 대회를 가지면서 끈질기게 대처승측과 협상한 끝에 을미년(乙未年) 여름에 합의한 결과 비구승측이 승리함으로써 종권(宗權)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정화운동사(淨化運動史)를 얘기하려면 원고지 천매로도 불가능함으로 생략하려 한다.

그런데 뒷면의 이야기가 무수한데 그 중에 인곡스님과 관련 있는 것을 한가지 소개해야겠다.

정화운동 당시 전북종무원장(全北宗務院長)인 매곡(梅谷)스님은 인곡스님과 둘도 없는 도반 사이이다.

옛날에 변산 월명암(月明庵)에서 함께 안거하였으며 백양사 운문선원(雲門禪院)에서도 여러철 함께 정진한 바 있는 절친한 도반인 것이다.

비구 대처 양측에서 독신승으로 5인의 대표를 내세워 이 분들이 종권(宗權)을 놓고 막판 협상을 하도록 했는데 대처측 대표에 매곡스님이 들어 있었다.

다섯 사람씩의 대표인만큼 어느 한쪽에서 상대방에 손을 들어주지 않는 한 협상은 계속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처측 대표에 매곡스님이 끼었으니 비구측에서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매곡스님은 현재 비록 전북종무원장이긴 하지만 여지껏 선방만을 드나들며 참선으로 일관해온 알짜배기 수좌가 아니던가?

그래서 가장 절친한 사이였던 인곡스님이 매곡스님과 접촉하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 받았다.

먼저 인곡스님의 상좌이자 시자(侍者)인 혜적(慧寂)이 사간동 법륜사(司鍊洞 法輪寺)로 매곡스님을 찾아 가서 스님의 안부를 전하였다.

혜적은 매곡스님께 큰절을 올리고 스승님이 안부를 여쭙는다고 여쭸더니 매곡스님이 매우 반가워 하시며,

“자네 은사스님은 어디 계시는지?”

“예, 서울 대각사(大覺寺)에 계십니다.”

대각사는 인곡스님의 스승님이신 용성(龍城)큰스님이 평생 계셨던 도량인지라 주위 스님들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문안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매곡스님은 대문까지 따라 나오신다.

그 때 혜적은 나직이 여쭌다.

“저희 스님께서 뵙고져 하십니다.”

“그래? 어디서?”

“내일 정오에 안국동 로타리에 있는 난다방으로 나오시면 저희 스님을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로타리가 넓은 지역인데 난다방을 찾을지 모르겠네.”

“인사동(仁寺洞)쪽으로 내려오시면 통문관(通文館)이라는 유명한 서점이 있습니다.”

“그 근방인가?”

“예.”

이렇게 해서 인곡스님과 매곡스님은 실로 여러해 만에 해후하였다.

“불교정화운동에 동참을 하지 못해서 미안하네. 내 신분이 전북 원장이라서 어쩔 수 없네 그려.”

“그거야 다 이해하고 있다네. 다만 옛날 선원에서 정진하던 생각을 잊어서는 안되네.”

“그야 물론이지. 그런데 선학원에 선방 출입하던 선지식스님네가 모두 모여 계시겠구만.”

“아무렴, 다 모여 있지.”

“동산스님이 주도(主導)하신다니 정말 기쁘네. 그 어른 생각이 언제나 옳곧거든.”

“그렇잖아도 동산스님이 자네 얘길 자주 하셔. 전북에 한분 남은 선지식이라고 말일세.”

“전북 원장이나 하는 땡초중을 너무 많이 기대하시는구만.”

“내가 자네를 만난 것은 동산스님과 자네가 대좌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세. 오늘밤에 만나는게 어떤가?

“그렇게 주선해 주겠나?”

“암 하구말구.”

이렇게 해서 그 날 밤 8시에 다방 근처에 있는 모여관에서 대좌하기로 약정하고 헤어졌다.

인곡스님과 매곡스님은 정화불사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으며 두 분 모두 뜻이 같았다.

그 날 밤 8시에 동산스님과 인곡스님은 약속한 그 여관으로 갔다,.

시자도 떼어 놓고 두 분만 살짝 선학원을 빠져 나갔는데 동산스님의 시자 지흥수좌와 인곡스님의 시자 혜적수좌는 30여보 떨어져서 두 큰스님을 경호 하였다.

두 시자(侍者)는 여관문이 바라보이는 골목 양쪽에 숨어 서서 혹 훼방꾼이 접근하는지를 감시하였다.

여관에는 매곡스님이 먼저 와 계셨으며 세분은 방 안에 선채 서로의 손을 꼬옥 쥐고 놓을 줄을 몰랐다.

동산스님이 아랫목에 앉고 인곡 매곡 두 스님은 윗목에 앉았다.

마악 앉자 마자 동산스님은 벌떡 일어나 매곡스님에게로 달려가서 대뜸 멱살을 부여잡고 어성을 높여 이르기를,

“청정본연(淸淨本然)커니 운하홀생산하대지(云何忽生山河大地)오? 속도속도(速道速道)하라.”

‘청정본연 하다면 어째서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하였는고? 속히 이르고 속히 이르라’ 하고 다그쳤다.

이에 깜짝 놀란 매곡스님은 멱살을 움켜쥔 동산스님의 손을 잡으며,

“큰스님 이 손을 놓으십시요. 소승이 이르겠습니다.”

“속히일러라. 일러야 손을 놓지.”

“아이구, 숨이 막혀 대답도 못하겠습니다. 손을 놓으십시요.”

그제야 동산스님은 움켜쥔 손을 풀고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평생 살림살이를 화반탁출(和盤托出)하게나. 고까짓 종무원장 한답시고 대처승들 수괴 노릇이나 한단 말인가?”

매곡스님은 옷매무새로 고치고 나서 동산스님에게 삼배를 올린다.

“소승이 업장이 두꺼워 닭벼슬만도 못한 종무원장 노릇을 하고 있지만 수좌정신(首座精神)만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여삐 여기시고 하명(下命)만 하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동산스님은 성질을 누그러뜨려서 불교정화를 해야하는 까닭에서 시작하여 대처승들의 행패에 대해 누누히 설명하고 신명을 바쳐 함께 일하자고 역설하였다.

이에 매곡스님은 대처종단에서 5인 대표로 선출했지만 사퇴함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대처종단에 협조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매곡스님이 대처승측에 협조를 않음으로써 대처승측에는 치명적인 큰 타격이었다.

그 뒤 매곡스님은 전북으로 내려간 즉시 종무원장직을 사퇴하고 산사(山寺)로 몸을 숨기고 다시 화두를 챙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객의 매운 맛을 천하의 대처승들에게 보여주었으며 정화운동의 향방에도 크게 영항을 미쳤던 것이다.

선학원이 비좁아서 태고사(현재의 조계사)를 접수하였지만 많은 대중의 공양거리는 늘 부족했다.

그러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못먹고 못입은 채 큰스님네의 지휘 하에 열심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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