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84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정화운동(淨化運動)…<1>

창원(昌原) 땅 불모산 성주사(佛母山 聖住寺)는 신라 말기 무렴국사(無染國師)께서 개기(開基)하신 대가람이다. 정조사(正朝使) 왕자 흔(王子 昕)을 따라 당나라에 유학을 갔는데 무렴국사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8세손이어서 흔왕자의 도움을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귀국할 적에는 상선을 얻어 탔는데 창원포(昌原浦)에 내려 성주사를 창건한 뒤 서라벌에 노모(老母)가 아직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갔다. 흔왕자는 스님이 귀국한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재회의 기쁨을 나눈 뒤 이르기를,

“우리 선고(先考)께서 식읍(食邑)을 받은 곳에 가람을 이루고져 하니 주석해 주십시요.”

그 곳은 충청도 보령(保寧) 땅 웅천현 성주사(熊川縣 聖住寺)이었다. 이 곳에 가람을 지으니 성주사(聖住寺)가 그것이다.

그런데 웅천현 성주사가 또 한 곳이 있다. 창원 성주사다. 이 곳 지명도 웅천현(熊川縣)이고 절 이름도 성주사(聖住寺)다.

산 이름만 불모산 성주산으로 다를 뿐 고을 이름과 절 이름이 같은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아마도 무렴국사가 창원 성주사에 기왕 가람을 이룩했으니 보령 성주사에 가지 않으려 하자 흔왕자는 강권하여 스님을 보령 성주사로 모시고는 고을 이름과 절 이름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리라. 보령 성주사에 무렴국사가 석장(錫杖)을 높이 걸자 사방에서 운집한 대중이 무려 천명을 넘었다.

헌데 창원 성주사는 국사가 자리를 옮긴 뒤 더 발전하지 못한채 선종사찰(禪宗寺刹)로 명맥을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조 말엽 범어사의 등암(藤岩)선사가 성주사를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현재 일조화상(一照和尙)이 총림을 개설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고 있는 중이다.

지난 해 가을 고암(古庵)스님이 인곡스님을 방장화상으로 모시려 했는데 통도사 조실로 가셔서 미뤘었다. 헌데 해제를 하기가 무섭게 수좌들을 통도사로 보내어 인곡스님을 성주사로 모셔오기에 이르니 수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인곡스님은 구하(九何)노스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좌들을 따라 성주사로 향했던 것이다. 스님이 굳이 성주사로 오게된 것은 고암스님과의 언약 때문이었다. 통도사에서 겨울을 나고 바로 옮겨 오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성주사는 불모산이 동쪽과 남쪽, 그리고 남서쪽을 빙 둘러 싼 도량이어서 마냥 아늑한 분위기다. 방사가 비록 많지 않지만 총림이 된다면 차츰 건물이 더 들어설 것이다. 인곡스님과 고암스님은 주지스님이 갖은 애를 쓰고 있으니 총림을 기필코 이룰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총림을 이루려면 대중의 식량사정 해결이 선결문제이고 모자라는 식량을 경남종무원(慶南宗務院)에서 후원해 주기로 약속을 받은 상태인지라 일조주지는 날마다 경남종무원에 출근하다시피 하여 졸라대고 있었으나 종무원 측은 미지근한 답변으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애당초 경남종무원측을 믿고 총림을 만들겠다고 시작한 것이 시행착오였다. 대처승이 장악하고 있는 종무원을 너무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종무원 측은 끝내 쌀 한톨도 안주었고 돈 한푼도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총림은 자동적으로 무산되었으며 인곡스님과 고암스님은 진주 연화사(晋州 蓮華寺)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연화사도 오래 있을 곳이 못되었다. 여기도 식량사정이 좋지 않은 때문이었다.

인곡스님은 시자(侍者) 혜적(慧寂)의 안내로 고성 옥천사(固城 玉泉寺)로 향했다. 산내 암자인 백련암(白蓮庵)에 선객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백련암은 규모가 작은 암자지만 암자 앞에 대밭때문에 아늑한 분위기의 가람이어서 수좌들의 안거처로 알맞은 도량이다. 여기에서 여름을 날까 했는데 해인사에 대중이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오자 인곡스님은 혜적을 불러 걸망을 챙기라 지시한다.

“여기에서 여름을 나시지요.”

“아니다, 해인사로 갈란다. 대중이 모인다는구나.”

“그래도 그 곳은 안심할 수 없습니다. 산악지대라 어느 때 공비들이 들이닥칠지 모르잖습니까?”

“공비가 설혹 오더라도 이 늙은이를 어찌 하겠느냐? 너는 여기 있거라. 나는 갈란다.”

이렇게 하여 인곡스님은 아침국을 든뒤 해인사로 향했다. 백련암은 6.25 이후 많은 본분납승(本分衲僧)이 거쳐간 곳이다. 석우(石友)스님 보문(普門)스님 인곡스님 관응(觀應)스님 문성(汶性) 서옹(西翁)스님 월하(月下)스님 호월(皓月)스님 구담(九曇)스님 혜진(慧眞)스님 혜암(慧庵)스님 (道堅)스님 창현(昌玄)스님 등이 앞서거니 뒷서거니하여 백련암에서 정진했던 것이다.

인곡스님은 해인사(海印寺)가 좋았다. 마치 고향집인양 무조건 좋았다. 인곡스님이 돌아오시자 대중스님들은 모두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제야 두 다리를 쭈욱 뻗고 자겠구나.”

“스님, 해인사가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그래, 해인사가 좋아.”

“도인스님은 경계에 이끌리지 않는다던데요.”

“새가 낮에 날아다니다 밤에 쉴 적에는 반드시 하룻밤 묵을 숲을 가린다. 하물며 인간이 자기 몸을 의탁하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스님께서 경계에 이끌리지 않으시면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 아니겠습니까?”

“처처안락국이지.”

“그렇다면 다른 곳에 정착하셔도 될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왔지.”

시자 혜적은 슬그머니 스님을 떠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갑오년(甲午年)의 여름철은 퇴설당(堆雪堂)에서 20여 대중과 함께 큰탈 없이 안거(安居)하였다.

6·25를 치르면서의 첫 안거인지라 수용(受用)은 예전보다 못했지만 대중들의 정진에 대한 의욕은 대단해서 누구 하나 괴각을 부리거나 말썽을 피운 납자가 없어서 실로 의미있는 안거로 기록될 만 하였다.

그런데 반산림(半山林)이 지날 무렵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전국비구승대회(全國比丘僧大會)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사실상의 방장(方丈)이신 인곡스님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안거 중에는 금족(禁足)이야 말로 철칙인데 이 법규를 깨뜨리고 대회에 참여해야 하느냐, 아니면 철칙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중대한 결정을 인곡스님이 내려야 했다. 대중들의 의견은 찬반양론이 맞서서 결국 큰스님의 결단에 따르기로 했다.

인곡스님은 심사숙고 끝에 대중에게,

“이번 비구승대회(比丘僧大會)는 우리 수좌(首座)들의 사활이 걸린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불교가 일제(日帝)의 잔재(殘滓)를 말끔히 씻어내고 우리 본연의 불교를 회복한 기회인 만큼 전국 선원대중이 주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살신성인(殺身成仁), 위법불석신명(爲法不惜身命)의 비장한 각오로 대회에 참여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아는 바이니 대중스님들 모두가 따라 주기를 바란다.”

인곡스님의 이 말씀에 대중들은 일제히 찬성하였으며 대중은 여비가 마련되는 대로 서울을 향하여 떠나갔다. 이 제1차대회의 정식 명칭은 ‘전국비구승대표대회(全國比丘僧代表者大會)였고 양력 8월 24일에 선학원에서 개최하였다.

인곡스님이 선학원에 도착하니 전국에서 큰스님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오랜만에 서로가 손을 잡고 난리를 치르며 고생한 얘기로 꽃을 피웠다. 선학원에는 동산(東山)스님 효봉(曉峰)스님·청담(靑潭)스님·원허(圓虛)스님·금봉(錦峰)스님·혜암(惠庵)스님·금오(金烏)스님·청호(淸湖)스님 등 조실급 큰스님이 20여명이나 있었다. 인곡스님을 가장 반긴 스님은 물론 효봉스님이었다.

“인곡스님.”

“방장스님.”

두분은 더는 말을 잊지 못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해후였다. 두 손을 놓을 줄 모른다.

“살았구려….”

서로의 눈시울이 적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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