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83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통 도 사 시 절(通 度 寺 詩 節)…〈4〉


  인곡조실(麟谷祖室)이 헌식(獻食)을 할 제면 까막까치떼가 몰려와서 스님의 어깨와 머리 위에 앉거나 헌식돌 주위에 모였다가 염불을 마치고 돌 위에 부어 주면 서로가 많이 먹겠다고 한바탕 아수라장을 이루는 장면은 직접 목격하지 않은 이는 믿지 않을 것이다.

보광선원에서도 그 희한한 광경은 매일 사시공양 후에 누구나 볼 수 있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광경이었다.

구하노스님만 빼고 전 대중이 헌식을 했는데 미리 와있던 까막 까치 까지도 멀리 달아나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헌데 인곡조실스님에게 오랫동안 따라 다니는 지병(持病)이 하나 있었다.

이른 바 습진(濕疹)이라는 귀찮은 병인데 두 발에 늘어 붙어서 행보에 막대한 지장을 주곤 했다.

조실스님은 이 습진을 다스리기 위해 좋다는 약은 다 써봤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소금을 불에 구어 빻아서 따뜻한 물에 풀어 발을 담구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개울에 서식하고 있는 거머리를 잡아다가 발의 피를 빨아 먹게 하기도 했지만 그 때에만 조금 시원했지 완전한 치료방법은 못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여서 외모로 보아 단단해 보이는데 습진으로 인한 고통은 계속 이어져 왔으니 정작 본인으로서는 심적인 부담이 여간 크지 않았을 것이건만 그런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니 조실스님의 지병을 알고 있는 이는 몇사람 되지 않았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이 겨울에 부산 국제시장(國際市場)에 큰 불이 났다. 통도사에서도 큰 불이 난 것을 확인하리만큼 남쪽 하늘이 환히 밝았으니 그 피해는 오죽 했을까?

선원 대중 중에 젊은 수좌가 칠팔명 되었는데 그 중에 순곤(淳坤)비구가 있었다.

순곤은 언양(彦陽)의 두메산골에서 자라서 매우 순진하고 부지런했다.

늦가을에 선원 몫의 감을 딸 적에도 연일 감나무에 올라 부지런히 땄고 부목(負木)님이 화목을 미처 못해 오자 결제일을 치른 후에도 계속 화목을 해나르기도 했다.

이 순곤과 혜적 지흥 세사람이 하루는 자장암(慈藏庵)엘 가 금개구리 한마리를 잡아와서 어른스님네게 꾸중을 들었다.

“이 금개구리는 자장스님의 화현(化現)인데 함부로 다루면 되겠는가?”

통도사가 삭발본사이고 40년 50년을 여기에서 살아오신 노스님네는 금개구리에 대한 믿음이랄까 애착이랄까가 누구보다도 강해서 야단이셨다.

결국 금개구리는 날이 저물어 본자리에 보내줄 수 없어서 불단 앞에 놓인 다기(茶器)물 속에 넣어 드렸다.

다기 물은 부처님에게 올리는 청정수(淸淨水)인데 그 다기 속에 금개구리를 넣도록 한 것은 그만큼 금개구리에 대한 믿음과 존중심이 강했음을 알 만 했다.

헌데 하룻밤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보니 금개구리는 죽어 있었다.

노스님네는 대경실색하여 호령 호령하시여 야단을 치셨다.

“정말 큰일 났구나, 큰일 났어. 이제 큰 재앙이 닥쳐올 터인데 이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이냐?”

금개구리를 죽게한 과보(?)로 큰 재앙이 닥쳐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금개구리가 죽은 다음 다음날에 국제시장에 큰 화재가 났던 것이다.

노스님네의 큰 재앙설이 딱 맞아 떨어졌으니 젊은 수좌 셋은 대중공사에서 일천배 참회의 엄한 벌이 내려졌다.

셋은 대웅전에서 오전 내내 일천배를 올리며 참회진언을 외워야 했던 것이다.

금개구리가 창건주이신 자장법사의 화현이라는 굳은 믿음.

셋은 이 믿음앞에 나약한 존재였다.

영하의 추위인데도 천배를 올리고 나니 내의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설날이 십여일 앞에 다가온 어느 날 혜적 순곤 지흥의 삼총사(?)는 점심공양 후 극락암(極樂庵)엘 올라갔다.

텅 빈 절안은 마냥 적요로왔는데 한쪽 작은방 앞에 신발이 한켤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보니 그 방에 불을 땐 흔적이 보여서 순곤이 방문을 가만히 세번 두드렸다.

“거 누고?”

방안에서 나는 음성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 암자의 주승(主僧)이신 경봉(鏡峰)스님이셨다.

세사람의 절을 받으신 경봉스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반기셨다.

낮에는 빈 절에 오셔서 청소도 하며 지키고 계시다가 저물녁이면 큰 절로 내려가시곤 하는 것이 경봉스님의 일과라고 설명해 주셨다.

절을 아끼시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큰스님, 점심공양은요?”

“나야 오공불식(午供不食)이지, 해가 짧지 않은가?”

겨울 내내 점심공양은 거르시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극락암에서 하루를 보내신단다.

밤에는 혹 공비가 나타날른지 몰라서 쉬지 못하고 큰 절로 내려가신단다.

도량을 보여 주신다고 이 곳 저 곳을 안내해 주셨는데 구석 구석이 명경알 처럼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큰방 부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자부할 만한데 부엌 천정에 굵은 밧줄이 남아 있었다.

“저 밧줄을 보게 우리 선사(先師)스님들이 누룩을 빚으신 흔적이야. 누룩장사해서 재산을 모은거지. 통도사 5천석 전답은 선사스님들의 피와 땀으로 모으신거야. 산도 마찬가지지. 저 밧줄을 남겨둔 것은 선사스님네의 노고를 잊지 말라는 훈계야.

“예……”

“근래에 어떤 절에서는 산의 울창한 나무를 마구 베어 팔아먹는다는데 일초일목(一草一木)이 선사스님네의 정성으로 가꾸어진 것이어서 그 속에 선사스님네의 얼이 배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구 또 저 풀과 나무들로 모두 생명체거든 일체중생을 건지겠노라는 대원력을 세우고 출가 수도 한다는 사문(沙門)이 생명체들을 함부로 앗아서야 되겠는가 말씀이야, 아니 그런가? 젊은 선객스님들.”

“지당하신 지적이십니다.”

경봉스님은 원주실 옆에 있는 고방을 열더니 조그만 소쿠리에 홍시를 꺼내더니 특유의 미소를 지으시며,

“이거 잘 익은 홍시지. 많이들 들지.”

“빈절인 줄 알았는데 차담이 다 있네요.”

“차담이 없이 대접할게 있어야지. 이 홍시가 비록 굵지는 못해도 달기로는 여느 과일보다 더하거든 자 들어봐요.”

경봉스님은 먼저 하나 드시고는 권하신다. 순곤 비구는 워낙 대식가여서 순식간에 대여섯개를 삼킨다.

“조금 차갑지? 오장육부가 단박에 성성(惺惺)해지거든.”

경봉스님은 큰절 구하(九河)노스님의 친사제인데 일찍이 큰절 주지직을 역임 했으며 참선하다가 식광(識光)이 발동하여 헤매던 중 전강(田岡)선사를 만나 식광에서 벗어났다는 소문이다.

주지로 있을 적에 보타암(普陀庵)의 젊은 비구니가 배가 부른 사건이 있었다.

그 비구니는 율주(律主)이신 해담(海曇)스님의 의복을 도맡아 세탁해 드리고 또 조석공양의 반찬도 챙겨 드려온 터인데 임신을 했으니 율주스님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경봉주지는 밤에 대중 몰래 그 비구니를 주지실로 불러 대뜸 하는 말이,

“내일 산중총회를 붙여 너를 임신 시킨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테니 나 경봉주지스님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달리 말하면 너는 물론이고 통도사 전대중이 모두 죽는다. 알았느냐?”

“없는 일을 어떻게 거짓말을 합니까?”

“거짓말이라니? 아 내가 너하고 몇번 잠자고 생긴 일이니 장본인은 내가 아니고 누구란 말이냐? 네가 그렇게만 대답한다면 그 뒷처리는 내가 책임지겠지만 만일 딴말이라도 한다면 너도 죽고 우리 통도사도 다 죽게 된다. 알았느냐?”

“예∼”

예나 지금이나 높은 자리는 많은 사람이 눈독을 들이는 법.

율주 자리는 가장 높은 자리인지라 노리는 스님들도 많았고 또 그들은 해담율주를 축출코져 대중을 선동하고 다녔으며 급기야 산중총회까지 소집했다.

그러나 그 비구니는 두번 세번 묻는데도 주지스님이 장본인이란 답변이었다.

“자 들었지요? 이 비구니는 이제 숨길 것 없이 내 아내이니 내가 데리고 가겠소이다.”

하고 주지직 사직서를 제출하고는 비구니를 데리고 신평으로 내려 갔다.

해담율주를 경봉스님이 구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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