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81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통 도 사 시 절(通 度 寺 詩 節)…〈2〉


  통도사(通度寺)라는 이름을 살펴보자. 통(通)은 왼통ㆍ통틀어ㆍ통달하다 등의 뜻을 지녔고 도(度)는 건넌다ㆍ법도ㆍ재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통도(通度)는 왼통 제도한다는 뜻으로 정리한다. 불지종가(佛之宗家)다운 이름이다.


인곡스님이 조실로 부임한 보광선원(普光禪院)은 결제대중이 25명, 여기에 구하(九河)노스님과 오해련강백(吳海蓮講伯)이 참여함으로써 개설된 이래 최대의 인원이 운집한 것이다.


해련강백은 창원 성주사(昌原 聖住寺)의 강주(講主)로 초빙되어 몇 달 계시다가 총림이 깨질 것 같아 사임하고 본사로 돌아온 것이다.


해련강백은 이른바 천재(天才)라는 칭호를 들어온 분이다.


동경(東京) 유학시절 일주일 만에 영어사전 한권을 다 외웠다 한다.


휴대용 콘사이스의 단어 수는 적어도 3만 단어를 상회하는데 이를 일주일 만에 암기한 정도면 과연 천재라는 칭찬을 들을 만 하다.


강원에서 이력을 볼 적에 초심문(初心文)에서 화엄경까지 10년 동안 펼친 경율론(經律論)을 모조리 외웠단다.

그래서 해련강백을 옥편박사(玉篇博士)로 동료들 간에 불려진 것이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해련강백이 결제한지 십여일 뒤에 본사로 돌아와서 구하(九河)노스님에게 인사를 드리자 노스님의 특별한 배려로 선방에 방부를 드린 것이다.


통도사가 건물 많기로 첫째이긴 하지만 해련스님이 기거할만한 마땅한 방사가 없었다. 화목을 때야 하는데 부목(負木)이 없으니 화목을 마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부목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감로당(甘露堂)에 살고 있는 자운스님이 부목 한사람을 두고 있었고 선원과 노전채ㆍ종무소 등을 맡은 부목님이 한 분 있었는데 두 분의 힘으로는 진종일 화목을 해 날라도 모자랄 지경이어서 독방을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화목 사정이 어려운지라 종무소 스님들 대부분은 종무소방 하나만을 사용하고 잠은 각기 신평에 있는 자택에서 자고 올라오곤 했다.


해련강백은 선방에 방부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구하노스님의 특별한 배려였음을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아무튼 겨울 내내 별로 졸지도 않고 꼿꼿이 앉아 있었으므로 대중들은 모두다 큰스님은 역시 다르다고 입을 모아 칭송했다.


해련강백 얘기를 하다보니 조실스님의 결제법문이 빠졌다. 다시 결재일로 돌아가서 그 날의 표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주지스님은 오춘고화상(吳春皐和尙)이니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불교대학을 나온 석학(碩學)이다.


결제법문은 대웅전에서 있었는데 조실스님은 고사(固辭)하였지만 산중 노덕스님네와 종무소 측의 권유로 마침내 허락을 내리셨다.


전쟁 중이라 어수선하고 큰절이 텅 비어서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대웅전을 가득 메운 사부대중은 실로 오랜만의 법회에 흔연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다.


선원대중과 감로당의 강원대중을 합하여 30여명, 그리고 종무소대중이 다섯 분 도합 40명의 스님네와 신평에서 올라온 신도들 가운데 조실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어간에는 구하(九河)노스님과 운허강백(耘虛講伯)이 앉으시고 구하노스님 곁으로는 주지스님과 종무소대중이 자리했고 운허강백 옆으로는 자운율사(慈雲律師)와 강원대중이 앉았으며 그 뒤에는 보타원(普陀院)대중 예닐곱 명 비구니스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청법게(請法偈)에 이어 잠시 입정(入定)이 있은 연후에 조실스님의 법어가 시작되었다.


조실스님은 주장자를 높이 들어 대중에게 보이신 다음 이르시되,


“옛날 세존(世尊)께서는 염화시중(拈花示衆) 하시고 오늘 산승(山僧)은 염주장시중(拈柱杖示衆)하노니 세존의 염화시중과 같은가 다른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청법대중은 숨을 죽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조실스님은 낭랑한 음성으로 송(頌)하시기를,


昔日世尊擧拈花에 

迦葉一人獨微笑러니

今朝老僧拈柱杖하니

法界含靈全體笑로다.


옛날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심에

 가섭 한사람이 홀로 웃었더니

 오늘 노승이 주장자를 드니

 법계함령이 모두 웃는도다.


게송을 읊으시고 한참을 말없이 계시다가 다시 이르시기를,


“이 일은 혹 한 말씀으로 다할 수 있지만 혹 많은 말씀으로 다하기 어려우니라. 그래서 세존께서도 이르시기를, ‘녹야원(鹿野苑)에서 발제하(拔提河)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한 말씀도 설할 바가 없느니라’ 하셨으며 육조(六祖)스님께서 일물(一物)을 제창(提唱)하신데 대하여 남악회양(南岳瀤讓)선사께서,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이니다’ 하셨느니라. 이렇듯이 선(禪)은 언어문자(言語文字)로 말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나니 오직 스스로 깨쳐 수긍할 따름이니라. 삼장(三藏) 십이부경론(十二部經論)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니 손가락으로 달이라 그릇 알지 말지어다. 오늘날 조도(祖道)가 쇠미(衰微)해져서 세상이 혼탁해졌나니 본분납승(本分衲僧)은 더욱 분발하여 명심견성(明心見性)하여야만 나도 살고 불법(佛法)도 살며 천하가 태평하여지리라. 대중이여 삼동안거(三冬安居)를 보다 뜻있게 실참실구(實參實究)하라. 광음(光陰)은 우리를 위하여 잠시도 멈추어 주는 법이 없나니 헛되어 보낸 뒤에는 후회하여도 다시 돌아오지 않느니라.”


風動心搖樹하고

雲生性起塵이니라

若明今日事인댄

昧却本來人하리라


바람이 동하매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나매 성품이 티끌을 일으키도다

만일에 오늘 일을 밝히려 할진대

본래인을 어둡게 하리라


조실스님은 주장자를 세 번 울리고 곧 법좌에서 내려 오셨다.


 보광선원(普光禪院) 대중 중에 경운(耕雲)스님은 입승(立繩)이고 대흥(大興)스님이 있는데 석호(石虎)스님의 상족(上足)으로서 식견이 뛰어나고 정진도 무섭게 해온 납자이다.


그런데 동산(東山)스님의 상좌로 덕현(德玄)이라는 스님이 있는데 대흥ㆍ덕현이 잘 어울려서 방선만 하면 논의하기를 좋아하였다.


반산림이 채 되기 전에 신도봉(辛道峰)이라는 수좌가 갈 곳이 없어서 묵을 방부를 드리고 지대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대흥ㆍ도봉ㆍ덕현의 세 사람이 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더니 하루는 원경각을 펼치고 셋이서 주동이 되어 돌아가면서 해석하고 질문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젊은 측 수좌들이 그들의 주위에 둘러 앉아 새기는 것에 주시하였음은 물론이다. 보안장(普眼章)을 석사(釋辭)하기를,


“譬如摩尼寶珠 映於五色하야 隨方各現인달 하야…”


이 대문을 석사하되,


“비유컨대 마니보주가 오색을 비추어서 방소를 따라 각기 나툼과 같아서…” 


여기 영어오색(映於五色)을 오색에 비추어서와 오색을 비추어서의 두 패로 갈라져서 서로 옳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실스님께 여쭙기도 하고 운허강백(耘虛講伯)에게도 여쭈었는데 두 분 모두 오색에 비추어서라 새기셨다.


오색을 비추어서로 새긴 사람은 대흥ㆍ도봉ㆍ덕현의 세 스님이고 나머지 대중은 오색에 비추어서로 새겼는데 위의 세 사람은 강사가 뭘 알겠느냐, 조실이 무슨 경전을 알겠느냐고까지 퍼부어대면서 큰 싸움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공부하는 사람이 경전을 놓고 설전을 벌일 수도 있긴 하지만 세 사람의 행패는 자못 도를 넘어선 짓이었다.


결국 대중공사가 벌어졌고, 묵을 방부를 드린 도봉스님은 걸망을 쌌고 대흥ㆍ덕현 두 스님은 조실스님의 호돤 꾸지람을 듣고 대중에게 참회를 드리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는데 먼 뒷날 대흥ㆍ덕현 두 수좌는 환속을 하고야 말았다.


실로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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