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9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통 도 사 시 절(通 度 寺 詩 節)…〈1〉


 

해제철은 선객들의 행각철이다. 석 달 동안의 금족생활(禁足生活)에서 해방되었으니 갈 곳이 많을 것이 당연(?)하리라. 선객들의 낙원 금정사(金井寺)는 그래서 더 바쁘고 소란스럽다,


인곡스님은 온천욕을 하기 위한 행각이므로 금정사가 제격인데 들어 앉을만한 빈방이 없어 사형사제인 동헌(東軒)스님의 청으로 한방을 쓰기로 했다.


“지난 봄에 사형님이 오셨다는데 출타 중이어서 모시지 못했습니다.”


동헌스님은 인곡스님을 깍듯이 모셨다. 사형사제지간인 것도 있지만 수행을 투철히 잘해온 인곡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아우님에게 신세를 지게 되어 도리어 송구스럽네요.”


“사형님, 어찌 그런 말씀을?”


 혜적시자(慧寂侍者)는 큰방 윗목에서 기거하면서 사숙님 방청소며 두 스님의 세탁물을 빨아 드리는 일을 했다. 인곡스님의 온천욕은 매일 동헌스님이 모시고 다녔으며 더러는 점심공양으로 두 분이 팥죽을 들고 오시곤 했다.


금정사는 주지를 선원장(禪院長)이라 칭하는데 유담(乳潭)스님이 원장으로 있다. 유담스님은 범어사(梵魚寺)의 성월(惺月)큰스님의 손상좌(孫上左)로서 어려서 이후 줄곧 선방생활로 일관해온 알짜배기 수좌이다.


스님은 단소(短簫)의 명인(名人)이다. 어려서 결핵을 앓았는데 금강산에 있을 적에 결핵을 고치려면 단소를 불라고 큰스님네가 일러줘 단소를 익혔다. 소질이 있었던지 단소에 관한 한 타의추종을 허락치 않는 명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대중이 입선에 든 초저녁에 단소를 꺼내들고 대웅전 뒤 바위 위에 앉아 청아한 곡조를 뿜어내면 대중들은 졸음에서 벗어나 삼매경(三昧境)에 몰입한다.


유담스님은 문자 그대로의 멋쟁이스님이다. 뭐든지 자기 의사를 누르고 대중의 의견을 존중한다. 또 대중스님을 외호하는데 안주머니 겉주머니가 없다. 국악원(國樂院)이나 어느 모임에 나가 단소를 불면 얼마간의 수고비를 받는데 이 돈을 대중스님을 위해 흔연히 내놓는다.


불공(佛供) 돈은 원주(院主)가 모아 대중을 위해 쓰고 그래도 모자라면 원장스님을 위해 쓰고 그래도 모자라면 원장스님에게 손을 내미는데 원장스님은 자기 개인이 번 돈이긴 하지만 언제나 원주에게 털어준다.


또 큰스님네나 노덕스님네를 끔찍이도 위하고 섬긴다. 큰스님이 오시기만 하면 원장스님의 주선으로 대중 반찬이 융숭해지는데 이는 어른스님을 받드는 원장스님의 간절한 정성의 결과인 것이다.


금정사 대중스님 사이에서도 성주사 총림 소식이 단연 큰 화제였는데 잘 영글지 않은 상태라 모두들 우려하는 말들이다.


10여일 온천욕을 다니느라 여념이 없는 인곡스님에게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큰 절을 올리고 나서 봉투를 앞에 놓는지라 뜯어볼 수밖에. 편지는 뜻밖에 통도사(通度寺) 구하(九河)노스님의 친서였다.


내용인즉 성주사에 총림이 개설되면 인곡스님을 방장화상으로 모신다 하는데 나라가 시끄러워서 잘 될 것 같지 않으니 금년 동안거에는 통도사 조실로 왕림해 주시오 하는 청이었다.


통도사 총무·교무의 두 화상이 구하 노스님의 특사로 찾아온 것이다. 큰방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대중스님 모두가 대환영이었다. 동헌스님도,


“사형님, 통도사로 가시는게 좋을 것 같소. 성주사 총림은 경남교무원의 후원 없이는 이뤄지기 어려운데 대처승들이 수좌들 잘 되라고 협조하겠습니까?”


“고암스님과 단단히 약속을 했는데요.”


“고암스님은 대세를 판단할 안목이 모자랍니다. 개의치 마시고 통도사로 가십시오.”


“그럼 동산사형(東山師兄)님도 뵐 겸 상의해 보십시다.”


“뵙는 거야 좋지만요, 통도사 가는 것은 여기서 결정짓고 통도사 스님들을 돌려보내야지요.”


이렇게 여러 스님네가 종용해서 마침내 조실로 가기를 결정지었다.


인곡스님과 동헌스님은 8월 초순에 동산사형님을 뵈러 갔다. 세분의 사형제지간(師兄弟之間)은 서로 손을 마주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모두들 피난 간 텅 빈 해인사를 혼자서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네 그려.”

“장경각 천일기도를 중단할 수 없어서 남았었지요.”


“아무튼 인곡사형님은 대단해요.”


동헌스님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점심공양 후 두어 시간 지나서 동헌스님은 금정사로 돌아가고 인곡스님은 조실스님의 만류로 사흘을 쉬었다. 조실스님은 원주를 불러 원주실을 비우게 하고 인곡스님이 기거하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원주실은 조실스님 방과 연이어져서 대청마루에서 북쪽은 조실방 남쪽은 원주실인지라 공양이 끝나면 조실방으로 건너와서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는 것이었다. 조실방도 두 칸이고 원주실도 두 칸이어서 혜적시자는 늘 은사스님 곁에서 지낼 수 있었다.


“듣자니 사형님이 견비통으로 고생한다던데 요즘은 어떠신가요?”


“우연한 기회에 스웨덴 의사들의 주선으로 자국서 제조한 견비통약을 먹고 씻은 듯이 나았다네. 참 고마운 분들이지.”


“다행이군요.”


“아우님은 요즘도 습진으로 고생을 하는가?”


“쉽게 낫지를 않네요. 평생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업보병(業報病)인가 봐요.”


“참으로 안됐구만…”


두 스님은 젊어서 제방선원(諸方禪院)에 다니던 이야기며 스승이신 용성화상(龍城和尙)이야기 하며 요즘의 불교계 이야기 하며 작년에 범어사에서 치른 전몰장병위령제 등등 평생 동안 겪고 보아온 이야기를 화제 삼아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다.


조실스님의 시자인 지흥(知興)은 조실스님이 저토록 많은 말씀을 하며 담소를 나누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엄하기만 하신 어른에게 저렇게 천진한 면모가 있는가 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시자 지흥은 본시 백양사(白羊寺)에 출가한 인연으로 인곡스님에 대해 만암(曼庵)노스님에게 많이 들었으며 또 다른 스님들에게도 수행 잘하고 도인스님이라고 들은 바 있어 한번 뵙기를 갈망해 왔는데 가까이 모시니 그지없이 기뻤다. 혜적수좌와는 동년배여서 금방 친해졌다.


인곡스님이 통도사 조실로 가게 되었음을 알게 된 조실스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칭송을 아끼지 않으신다.


“조실이사 아우님이 나보다 먼저 했었지. 서른 전에 운문선원(雲門禪院)조실을 역임했거든.”

“조실을 먼저 하면 무얼 합니까? 다 부질없는 명예지요.”


“가야총림에서도 인곡당이 방장 노릇을 했지 않은가? 실질적인 방장 말이야.”


“아닙니다. 천일기도 기도법사를 역임했지요.”


두 분은 일제히 크게 웃는다.


인곡스님은 금정사로 내려가서 온천욕을 며칠 더한 뒤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으로 떠났다.


당사 통도사는 육군병원이 들어서 2년간 대중방에 부상병들이 가득하였는데 금년 봄에 거의 옮겨가자 감로당(甘露堂)에 자운(慈雲)스님이 운허강백(耘虛講伯)을 모시고 와서 7,8명의 학인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보광전은 본래 선원이어서 선객스님 10여분이 정진하고 있었으며 아래채에는 이 절 최고원로인 구하(九河)노스님이 시자 한사람을 데리고 계신다. 선원은 구하노스님의 원력으로 지탱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여 진다.


인곡스님을 조실로 모시자 비로써 선객들이 20여명 모였으며 사중에서도 관심을 갖고 후원하기 시작했다. 범어사 조실스님 시자는 한철만 나기로 하고 큰스님의 허락을 얻어 보광선원에 입방했다. 그래서 혜적과 지흥은 더욱 친숙해 졌으며 감로당에서 능엄경(楞嚴經)을 보고 있는 지관(智冠)스님과 셋이서 자주 만났다.


통도사는 불지종가(佛之宗家)라는 이름에 걸맞는 대찰이다. 자장율사(慈藏律師)께서 중국 오대산(五台山)에서 문수진신을 친견하고 받아온 불정골(佛頂骨)ㆍ불사리(佛舍利)ㆍ불가사(佛袈娑)를 봉인함으로써 불지종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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