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9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가 야 총 림 (伽 倻 叢 林)〈7〉


혜적수좌의 속가는 아버지는 이미 작고하셨고 편모슬하에 두 누님과 혜적수좌등 삼남매가 자랐는데 두 누님은 결혼하였고 집에는 어머니 혼자 계신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뒤면 어머니의 회갑이니 외아들인 혜적수좌가 집에 가서 회갑을 맞는 어머니에게 아들 노릇을 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혜적은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하고 누님은 함께 가자고 하니 이를 인곡스님이 누구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가 말이다.


“혜적아.”


“예 스님.”


“너를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에게 어쩌면 마지막 효도(孝道)일지 모르니 집에 다녀오너라.”


“스님 저는 출가자 입니다. 일자출가(一子出家)에 구족(九族)이 생천(生天)이라 했으니 제가 중노릇 잘 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앞으로 네가 할 탓이고 지금은 어머니 회갑에 가서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는 것이 효도니라.”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이 스승의 명(命)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스님……”


“네가 고집을 부리려거든 내 슬하를 떠나거라. 나는 내 명에 거역하는 제자는 필요 없다. 이 옷도 네가 싸가져 가거라. 너를 보내는 이상 이 옷을 받을만한 명분도 없으니 말이다.”


“스님……”


인곡스님은 입을 꼭 다물고 다시는 말씀을 않으셨다. 혜적은 누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서 한참을 얘기를 나누더니 장삼을 입고 들어와서 삼배를 올린다.


“제가 불민하여 스님께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스님 분부대로 어머님께 다녀오겠사오니 용서해 주십시요.”


혜적의 누님도 용서를 간절히 비는지라 그제야 인곡스님은 노여움을 풀고 다녀오도록 허락을 내리신다.


혜적수좌가 떠난 뒤 원주스님은 키가 크고 몸집이 장대한 젊은 수좌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드리도록 한다.


“이 수좌는 범어사 조실스님의 상좌인데 법명은 덕명(德明)이라고 합니다. 혜적수좌 다녀올 때까지 큰스님 시봉 드리기로 자원하였사오니 슬하에 거두어 주십시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원주(院主)로 있는 담연비구(湛然比丘)는 가야총림을 개설한 첫해에 선원에서 안거한 바 있어서 인곡스님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존경해오고 있는 터였다.


덕명은 지난해 겨울 결제날 사미계를 받았으며 지난 정월 해제일을 기하여 채공(菜供) 소임을 면하고 여기에 내려와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우람한 덩치에 비해 사회에 때 묻지 않아서 순진한 편이어서 큰스님 시봉을 정성껏 다할 것이었다.


인곡스님은 덕명에게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가르쳐 주셨다. 공짜로 시봉을 시키지 않으려는 방편이었다. 덕명은 갓 사미계를 받은 터라 글이라고는 한 줄도 배우지 못한 입장이어서 큰스님이 자진하여 글을 가르쳐 주신다니 여간 행운이 아니었다.


“초심문(初心文)의 저자이신 보조국사(普照國師)는 갓 머리를 깎은 사람에게 중노릇 하는 법을 자세히 가르치셨느니라. 이 가르침대로만 행한다면 중노릇을 반듯하게 잘하게 될 것이니 이 글을 머리 속에 모두 담도록 하거라.”


글을 외우라는 분부셨다. 그래서 덕명은 다섯줄의 초심문을 외우느라 진종일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었다. 큰스님 시봉이라야 아침 일찍 방을 쓸고 닦는 것 외에 공양상을 부엌에서 방까지 나르는 일이 전부였다.


혜적은 집에 간지 보름 만에 돌아왔다. 외롭게 계시는 어머니를 떨치고 오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그 보다도 대학에 진학하라는 친구들의 권유에 사로잡혀 그것을 떨치지 못해 차일피일 늦어진 것이었다.


친구들은 혜적의 천재적인 머리가 아깝다며 진학을 강권했고 혜적도 대학은 마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망설인 것이었다. 그 결론은 대학가는 것보다 대장경 공부하는 것이 수도(修道)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돌아온 것이었다.


혜적수좌가 돌아온 뒤에도 덕명은 큰스님에게 글을 배웠지만 워낙 송재(誦才)가 없어서 발심수행장(發心修行狀)의 반을 배운 것에서 마감했다.


인곡스님은 약 달포를 계시다가 창원 성주사(昌原 聖主寺)에서 고암(古庵)스님이 초청하여 그리고 향하신 것이다.


성주사는 문일조(文一照)라는 스님이 주지(住持)가 되어 고암스님을 모시고 총림을 개설한다는 소문이어서 수좌들 간에는 매우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인곡스님과 고암스님은 사형사제간이자 서로 아끼는 도반 사이여서 나주 다보사(羅州 多普寺)에서 헤어진 뒤 실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고암스님은 일조주지(一照住持)를 큰스님에게 인사시킨다.


“사형님, 일조스님을 저희 사제(師弟)로 제가 받아들였습니다.”


일조주지는 일제 때 항일 운동을 하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열손가락을 모두 잃었다. 동지(同志)들의 이름을 밝히라며 왜경들이 손가락을 자른 것이다. 그러나 끝끝내 입을  다물어 동지들의 희생을 막았으며 8.15해방으로 풀려난 뒤 뜻한 바 있어 스스로 머리를 깎았으나 스승님을 정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일제(日帝)에 협조한 중은 모조리 바른 중이 아니었다. 친일파 중이 어찌 참중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고암스님을 뵈온 인연으로 삼일운동의 주역인 용성(龍城)스님의 위패상좌가 된 것이다. 고암스님은 이 사실을 큰 사형님인 동산(東山)스님에게도 알리느라 일조주지를 데리고 범어사에 다녀오기도 했다.


일조스님은 대처승들에게 당당했다.

“너희는 친일(親日)을 한 매국노들이지 순수한 사문(沙門)이 아니야.”


왜경에 의해 두 손가락을 모조리 잘렸으니 잘린 손을 본 대처승들은 비록 늦깎기이긴 하지만 일조스님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다. 중이 처자를 거느린 자체가 친일을 저지른 짓이라는 말에 대답을 잃은 것이다.그래서 총무원(總務院)과 경남교무원(慶南敎務院)이 상의하여 일조스님의 입을 막기 위해 창원 성주사를 내어준 것이었다.


“성주사에 총림을 개설하면 적극 지원해 드리겠소.”


교무원측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단 한차례도 지키지 않았다. 전시(戰時)라서 각 절에서 올라오는 납부금이 잘 걷히지 않는다는 핑계였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지원 따위는 생각 밖의 일이었다.


성주사는 전답이 비교적 넉넉해 수좌스님의 선량(禪糧) 백명분 쯤은 확보가 가능했지만 쌀만 먹을 수는 없어 총림 계획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피난와서 갈 곳이 없던 수좌들은 총림 소식에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덩이처럼 사방에서 구름 모이듯 몰려왔다.


인곡스님과 고암스님이 좌정해 계시니 더욱 든든한지라 선객들을 신명이 나서 멀리 있는 도반을 불러 모으느라 분주했다.


일조주지(一照住持) 역시 대중이 불어나는 속도가 빨라지자 더욱 고무되어 연일 부산에 있는 경남교원에 찾아가 총림지원의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했지만 번번히 빈손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전쟁 중인지라 국민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형편이어서 신도들의 도움이 거의 없는 터에 총림 한다는 소리는 우뢰소리처럼 크게 외쳐놓고 자금이 없으니 일조주지의 가슴이야 오죽 하겠는가마는 이런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대중들은 방장화상(方丈和尙)으로 인곡스님을 모셔야 하느니 고암스님을 모셔야 하느니 하고 연일 논의만 무성히 하는 것이었다. 또 거기에다 반찬 사정이 안 좋은 것을 놓고 일조주지가 무능해서 그러느니 하며 주지를 탄핵하는 목소리가 굵어지더니 급기야는 주지를 바꿔야 한다는 성급한 선객들도 다수 있었다.

이렇게 논의와 기대가 범벅이 된 상태에서 여름철이 훌쩍 지나갔다. 인곡스님은 떠날 시가가 왔음을 직감하고 신병 치료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새벽예불 끝에 불모산(佛母山)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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