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8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가 야 총 림 (伽 倻 叢 林)〈6〉


6·25로 인해 가야총림(伽倻叢林)이 깨어진 이후 총림을 다시 부활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해 오고 있지만 총림은 우리들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는 총림은 불가능하다. 첫째 경제적으로 많은 납자를 수용할 능력이 없고, 둘째 젊은 스님들을 군대로 뽑아 가므로 젊은 납자들이 모여들 수 없다.


이 외에도 전쟁은 38선 주변으로 거의 국한되어 있지만 전국 산간지대에는 소위 ‘빨갱이’라는 공산분자들이 출몰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식량을 약탈해가므로 안심하고 고향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현저히 줄어들어 가고 있는 추세여서 스님들도 산중절을 포기하고 도시로 나가야 했다.


이런 현실하에 산중 깊숙이 자리한 해인사 역시 타격이 심하여 납자을의 발길이 뜸하여지자 인곡스님의 제자들도 일제히 다른 절로 이석(移錫)하시기를 바랐고 또한 스님께 진언하기를 마지 않았다.


방장(方丈)이신 효봉(曉峰)큰스님은 인민군이 몰려오기 전에 피난가셔서 요즘은 통영 도솔암에 정착 하신채 해인사로 돌아오실 기약이 없다.


최고 지도자이신 방장스님도 떠나셨는데 선덕(禪德)이신 인곡스님만이 해인사에 남아 지켜야할 어떤 책임과 의무가 없는 이상 다른 절로 가신다 해도 막을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인곡스님은 선뜻 일어서지를 못한다. 본시 우유부단한 성격도 아닌 스님인데도 결행(決行)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스님이 해인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곡스님의 ‘해인사 사랑’은 그 누구도 추종을 불허하리만큼 대단하다. 아니 대단하다는 표현도 적절치 못하다. 스님은 자신과 해인사를 분리(分離)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총림을 시작한 초기에 재정이 궁핍하여 곤란을 겪자 천일기도를 발원하여 몸소 기도 정진에 임했고 전쟁이 나자 모두 피난길에 올랐지만 스님은 해인사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혼자 남아서 정근을 거르지 않았다. 천일기도를 두 번씩이나 해낸 스님의 확고부동한 원력과 신심을 따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살펴볼 때 스님이 쉽사리 결행하지 못하는 심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사실 해인사를 떠난다 해도 가서 정착할 만한 마땅한 절을 물색해 놓은 곳도 없다. 그저 여기가 살아갈만한 여건이 못되니 얼마동안 다른 곳으로 가십시다 하는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다.


“무엇하면 안전한 곳에 토굴이라도 하나 짓도록 하십시다.”


맏상좌 혜관의 말이다.


그래도 스님은 말씀이 없다. 그저 묵묵히 앉아 계실 따름이다. 스님과 상좌들 사이에 가십시다 안가겠다 하고 실랑이를 한지 일주일 쯤 되었을까? 맏상좌 혜관이 불려와서 스님 앞에 꿇어 앉았다. 스님은 시자한테 먹을 갈라 하더니 붓을 당긴다.


示 慧庵性觀丈室


只比一段事    古今傳與授

無頭亦無尾    分身千百億

 

다만 이 한가지 일을

고금에 전하여 주었나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지만

천백억 몸을 나투도다


스님은 쓰기를 마치고 먹물이 마르길 기다려 잘 접은 다음 미리 만들어 놓은 봉투에 넣고 겉장에 ‘如是相信’이라 적는다. 이와 같이 서로 믿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번에 하산하면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겠느냐? 그래서 네게 법호 하나 지어 주는 바이다. 잘 호지(護持)하여라.”


“제가 법호 받을 자격이나 됩니까? 아직도 풋내기인걸요.”


“그렇긴 하지만 제자에게 법을 전해 주지 못하고 죽는다면 선사(先師)스님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되어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다.”


성관은 스님에게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삼배를 올렸다.


“아직 미거하오나 분골쇄신 정진하여 기대심에 부응하겠습니다.”


“음…….”


스승님은 고개만 끄덕이신다.

혜암(慧庵).


혜암성관(慧庵性觀)은 뒷날 가야총림(伽倻叢林)의 방장화상(方丈和尙)이 되고 더 나아가 조계종정(曹溪宗正)이 되어 사은(師恩)에 보답하게 된다.


인곡스님은 시자 혜적(慧寂)만을 데리고 산문(山門)을 나선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해인사를 무거운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이 후의 인곡스님은 정말 문자 그대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낭인(浪人)생활이었다. 어떤 스님이 부대사(傅大士)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스님의 생애입니까?”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동쪽 집에 가서 걸식(乞食)하여 먹고 집은 서쪽 집에서 잔다는 대답이다.


사문(沙門)은 원래 동가식서가숙의 생애이긴 하지만 동양삼국(東洋三國)은 인도(印度)와는 달리 추운 겨울을 갖고 있어서 집이 필요하다. 누구나 추위가 닥쳐오면 따스한 방안에서 생활한다. 헌데 그나마 자기 집(절)을 갖지 못한 사람은 동가식 서가숙할 밖에…. 그래서 사문은 자기 절이 없으면 토굴을 엮는다. 최소한 추위와 비바람을 피하고 막을 만한 움막이라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곡스님이 해인사를 떠난 것은 정확히 말해서 계사년(癸巳年) 춘삼월(春三月)의 화창한 날이었다. 만화방창호시절(萬花方暢好時節)이라더니 산과 들에는 새잎이 돌고 울굿불긋한 꽃들이 서로 다투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인곡스님의 눈과 귀는 꽉 닫히고 막힌지 이미 오래다. 명랑하고 싱그럽게 지저귀는 산새소리며 경쾌히 흐르며 예어대는 개울물 소리, 그리고 곱고 아름답게 핀 갖가지 꽃과 새움들이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곡스님은 부산으로 내려왔다. 지난번 온천욕으로 지병인 습진이 많이 완화되어 고생을 덜 했으므로 온천욕을 또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금정사(金井寺)에 걸망을 내려놓고 이틀째 목욕탕엘 다녀왔는데 한 청신녀가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누님.”


시자 혜적의 누님이었다. 청신녀는 인곡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철없는 동생을 거두어 주신 은혜 태산 같사옵니다. 저의 어머님이 뵈러 와야 마땅하온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가 왔습니다.”


혜적의 누님은 둘인데 큰누나가 찾아 온 것이었다. 그녀는 인곡스님의 겹옷 한 벌과 여름옷 한 벌을 해왔다.


“며칠 뒤면 저의 어머니 회갑(回甲)입니다. 어머니 옷 한 벌 지어 드리면서 큰스님 의복도 함께 마련했습니다. 거꺼이 받아 주시면 무한의 기쁨이겠습니다.”


“평생 먹물옷을 입고 살아온지라 의복은 늘 많이 있는데 번거롭게 지어 왔구만요.”


“말씀 낮추십시요. 저도 제자로 여기시고 편한 마음으로 대해 주십시요.”


사실 인곡스님은 누더기 한 벌과 현재 입고 있는 광목옷 한 벌 뿐이었다. 상좌가 들어올 적마다 당신의 옷을 내주셨으니 여벌이 없었던 것이다.


“스님, 기왕에 지어 왔으니 입으시지요.”


혜적의 권유였다.


“그럼 그렇게 하자. 어머님께 감사히 입겠습니다고 여쭈어 주시오.”


“큰스님 감사합니다.”


혜적의 누님은 큰스님 옷을 몸에 맞게 지으려고 아무도 몰래 해인사엘 가서 인곡스님의 키와 몸매를 눈대중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한가지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사흘 뒤가 어머니 회갑일인데 제가 동생을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외동아들이어서 일가친척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모정(母情)인가 합니다.


“스님.”


혜적이 나선다.


“저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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