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7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가 야 총 림 (伽 倻 叢 林)〈5〉


 

임진년(任唇年 · 서기 1952년) 4월 15일. 이 날은 이천일기도(二千日祈禱)의 회향일(回向日)이다. 천신만고(千辛萬苦)끝에 회향일을 맞은 산중의 온 대중은 인곡스님의 노고에 감격하고 감사를 드렸다.


6.25당시에 일년 남짓 혼자 계시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도 정근을 멈추지 않으신 불퇴전(不退轉)의 신심(信心)을 조금도 자랑하거나 꾸밈이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회향일을 맞은 인곡스님이다.


“두번씩이나 회향 하셨으니 이제는 후학들에게 미뤄주시지요.”


상하 노소의 대중스님들의 한결같은 권유였다.


“그럼 그렇게 해요.”


이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수순중생원(隨順衆生願)이라 하던가! 인곡스님은 선선히 대중의 의사에 수긍한다.


“스님 어디 바람이나 쏘이러 가시지요.”


새로 중이 되어 시자(侍者)로 있는 혜적(慧寂)의 진언이었다.


“바람이사 날마다 쐬지 않는가?”


“그 바람이 아니구요. 멀리 여행이나 다녀오시지요.”


“삼팔선에서는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난리통인데 한가히 여행이나 가자는 것은 옳지 못해.”


“한 바퀴 휘~ 돌아다니시면 새로운 신심도 나실 겁니다.”


“…….”


이삼일 지난 뒤 혜적은 맏사형인 혜관(慧觀)을 불러오시라는 분부를 받았다.


혜관이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자,


“오대산 한암(漢岩)큰스님이 입적하셨을 때 못갔는데 나 오늘 다녀올까 한다.”


시자가 권유할 적에는 출행을 거부하시더니 갑자기 오대산에 가시겠다니 혜적은 당황했지만 꾹 참았다.


“오대산은 삼팔선이 가까워서 아직은 위험합니다.”


“시방도 그 쪽은 시끄러운가?”


“예, 한암큰스님이 열반하신 후 오대산 전역에는 스님들의 자취가 끊어졌답니다.”


“그리 되었구나, 그렇다면 대전이나 부산에 가서 온천욕이나 하자.”


한암큰스님은 인곡스님이 젊었을 적부터 존경하고 좋아했던 만큼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냥 앉아 있었으니 가서 인사를 드리겠단 생각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시(戰時)다. 맘대로 오가지 못하는 세상인 것이다.


혜적은 맏사형이 마련해준 여비를 얻어 스님을 모시고 부산으로 향했다. 인곡스님은 습진으로 중년시절부터 고생해 오고 있다. 이미 지병(持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온천에 가서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면 좀 나아질까 해서 동래온천으로 내려간 것이다.


온천장의 금정사(金井寺)는 선학원(禪學院)소속이다. 대처승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선객들의 천국인 것이다. 인곡스님은 여기에서 일주일을 쉬면서 공중탕에 가서 두시간씩이나 몸을 담갔다. 2천일 동안 기도 드리면서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간 기분을 만끽한다.


온천욕을 마치자 인곡스님은 다시 해인사로 돌아왔다. 효봉방장(曉峰方丈)스님은 통영(統營)으로 피난 가셔서 용화사(龍華寺) 뒤편의 도솔암에 아주 눌러앉으셨다. 그래서 가야총림은 어른이 안계시니 대중들이 모이지를 않는다. 그나마 인곡스님마저 안 계시면 선객들의 발길이 뚝 끊어질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임자 스님들은 인곡스님이 돌아오자 안도의 숨을 쉰다. 방장스님이 안계신 가야총림은 사실상 인곡스님이 방장이셨다. 염화실(拈花室) 옆방으로 옮겨온지도 오래여서 대중들은 인곡스님을 의지하고 선방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선객들 중 젊은층은 징병이 싫어서 산중을 떠나 도시절로 옮겨 갔지만 중년층과 장년층 선객들은 가야총림을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시봉 드리고 있는 혜적(慧寂)에 대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자.


혜적은 대구(大邱)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갈 나이에 머리를 깎았다. 위로 누나가 둘, 아버지를 여윈 편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그 집안 어른들 대부분이 수(壽)를 누리지 못하고 모두들 젊어서 요절하는지라, 어머니가 외아들을 걱정해서 해인사 큰스님네를 찾아 뵙도록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인곡스님을 찾아뵈온 것이다.


혜적이 인곡스님을 뵈니 인곡스님이 낯설지 않은 구면(舊面)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자기가 갈망하던 스승님이란 믿음이 일었다. 그래서 중이되고 싶다고 했더니 스님께서,


“잘 왔다, 혜적(慧寂)아.”


하시며 즉석에서 법명으로 부르셨다.


혜적이란 위앙종(僞仰宗)의 제2대조인 앙산혜적(仰山慧寂)선사를 가리킴이다. 그래서 당장 머리를 깎고 그 날로 인곡스님이 사미계를 설해 주셨던 것이다.


계를 설해 주시고 이를기를,


“네가 불연(佛緣)이 두터워서 중옷을 입게 되었다마는….”


“예? 무슨 말씀입니까?”


“글쎄다….”


“글쎄다라니요, 아주 속시원히 일러주십시요.”


“네 얼굴을 살펴보니 수명(壽命)이 짧구나.”


“수명이 짧단 말씀은 어려서부터 익히 들어왔습니다. 실은 그래서 중이 되었구요.”


“글쎄다….” 네가 수명을 이어야 할텐데 가능할지 모르겠구나.”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했으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혜적은 총명이 절륜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할아버지에게 유서(儒書)를 배웠는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조리 읽었다한다. 글이라고는 한번 눈에 스치면 곧 머리 속에 담아진다. 그리고는 절대로 잊는 법이 없다. 혜적은 시봉하면서도 도서실(圖書室)을 쥐포수처럼 들락거리면서 눈에 띄는대로 경전을 탐독하는 것이었다.


인곡스님은 혜적의 일거수일투족(一去手一投足)에 대해 유심히 살피신다. 자고로 천재(天才)는 수명이 짧다는 설이 있는데 혜적수좌도 얼굴에 수명이 넉넉지 않아 보이니 더욱 마음이 쓰이신 것이다. 혜적수좌는 일년 남짓 해인사에 있는 사이 볼만한 경전은 모조리 훑어 보았다.


“스님, 이제야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갑니다.”


“그렇느냐? 나는 네가 학문에 너무 깊이 빠져들까 걱정이 되는구나.”


“어째서 그렇습니까?”


“교학(敎學)에 얽매이은 우(愚)를 범할까 해서니라. 교학은 참선하기 위한 기초만 알면 된다. 사문은 마땅히 참선을 해서 자기 마음을 깨쳐야만 가위 출세대장부(出世大丈夫)라 할 만 하는 것이니라.”


“저도 참선으로 업을 삼겠습니다.”


“그리고 너는 기도를 많이 하도록 하거라. 그래야 수명을 잇게 되는니라.”

혜적은 은사스님이 2천일 기도를 성취하셨다는 애기를 듣고 스님의 신심(信心)과 원력(願力)에 깜짝 놀랐었다. 별로 크지 않은 체구에 건강도 썩 좋아 보이지 않건만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을까? 하고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스승님을 살피곤 했다.


하기야 신심과 원력이 신체에서 나는 것은 아니다. 요(要)는 마음가짐이다. 마음을 굳게 다잡아야 신심도 원력도 우러나는 법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있다.


천일기도는 젊은 비구에게 넘겨주었지만 인곡스님은 사분정근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인곡스님이 헌식하는 장면을 보고져 하는 사부대중은 6.25이전이나 이후 할 것 없이 점점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지를 않았다. 속인들은 까막까치를 인곡스님이 어떤 요술로 불러들이는 것으로 그릇 알고 있는 이도 있고 말세에 희유한 신통력으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무심(無心)의 경지에 몰입하여 선악심(善惡心)을 여윈 자비심(慈悲心)의 발로(發露)라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까막까치의 눈에는 인곡스님이 살생하는 인간이 아니라 관음보살과 같은 초인적인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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