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6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가 야 총 림 (伽 倻 叢 林)〈4〉


  경인년(庚寅年 · 1950년) 6월 참혹한 동란(動亂)이 일어났다. 6·25라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이 3·8선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확산되자 가야총림(伽倻叢林)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피난을 가야 하느니 산중에 눌러 있는 편이 곧 피난이니 하고 정신없이 우왕좌왕 하다가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고 계속 남하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대중스님들도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성관(性觀)은 천일기도에만 마음을 쏟고 있는 스님에게 피난 갈 것을 종용했지만 스님은 요지부동이었다.


“공산당은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댄다고 합니다. 스님 남쪽으로 잠시 내려가셨다가 전쟁이 끝나게 되면 다시 오셔서 기도를 드리시지요.”


“나는 해인사를 지킬란다. 팔만대장경각(八萬大藏經閣)에 불이라도 나면 어떻하겠느냐? 나라도 남아서 불을 꺼야지.”


“해인사도 소중하고 장경각도 소중합니다만 사람 목숨이 더 소중하지요. 사람이 살아 있어야 불이 나면 불도 끄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나는 안갈란다. 너는 젊으니 어서 내려가거라.”


며칠을 두고 싸우다 시피하며 졸라댔지만 스님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성관(性觀)은 인민군이 김천(金泉)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기야 피난길에 올랐다.


인곡스님은 텅빈 해인도량(海印道場)을 혼자 남아서 도량청소도 하고 시간 맞추어 목탁을 울리며 기도에 임하면서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


수백명이 도량을 메운 해인사에 먹물 옷 입은 스님이나 후원에서 일하던 백의(白衣)등의 그림자마저 사라진 예는 아마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해인사가 창건된 이후 몽고의 난·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겪었지만 이렇게 텅 비운 적은 없었다. 북쪽 인민군은 몽고군·왜군·청군보다 더 무서운 군대란 말인가?


인민군은 우리와 동족인데도 외국군보다 무서운 것은 그들의 사상성(思想性)에 있다. 종교를 무시하는 사상, 대다수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사상, 선과 악을 과거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판정하지 않고 자기네 목적달성을 위하여 자기네가 정하고 집행하는 사상.


이것이 공산주의 사상이고 보면 사람 목숨을 그 무엇으로도 보장받지 못하니 무서울 수 밖에 없고 그들을 피하여 달아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곡스님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왜 그들이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더더구나 모른다. 우리나라 군대는 무얼 하고 있기에 그들이 승승장구 하며 물밀듯 남하하고 있는지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 중의 바보일 것이다.


상황은 한국군은 쫓기고 인민군은 쫓아오고 있다는 것 뿐이다. 쫓고 쫓기는 아수라장에서 많은 목숨들이 무참히 죽어간다는 사실을 부처님은 알고 계시는지요?


인곡스님은 온 나라가 아비규환 속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부처님께 알리기 위해 피난도 접어두고 목탁을 울리고 있는지 모른다. 손수 마지 지어 올리고 또한 도량을 쓸고 닦으면서 어서 속히 부처님께서 실눈을 뜨셔서 참혹한 전쟁터에서 자비광명을 비추시기를 기원하는지도 모른다.


인곡스님의 기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야총림에서 하루 속히 수백명의 납자들이 운집하고 수천 수만명의 청신사녀(淸信士女)들이 왕래하는 수행도량이 되기를 기원한다. 헌데 총림이 텅 비어있는데도 인곡스님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미래불(未來佛)이 있었다. 헌식(獻食)할 적마다 스님의 머리와 어깨에 앉아 염불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까막까치가 그들이다.


어찌하여 까막까치는 피난길에 오르지 않고 도량에 남아 있는 것일까? 이 미래불들은 인민군도 무섭지 않나부다. 공산주의사상도 안 무서운 것일까?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 했으니 이 까막까치떼도 틀림없이 당래에 부처가 될 것이다. 이들은 내생에 인도환생(人道還生)하여 인곡스님의 제자가 될 것이며 인곡스님을 지켜준 공덕으로 누구보다 먼저 성불할 것이다. 인곡스님은 비록 텅 빈 산중에 혼자가 되어 있지만 이들 미래불이 지켜 드리고 있으니 외롭지 않다.


까막까치들은 스님의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스님이 장경각에서 목탁을 울리는 동안 그들은 장경각 주변에 모여 염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스님이 움직이면 마치 그림자인양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헌데 하루는 까막까치떼가 어디를 갔는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었다. 사시마지를 올린 뒤 헌식을 하는데도 그들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스님이 헌식그릇을 들고 뒤돌아 서는데 낯선 군대들이 짧은 총을 들고 다가오더니,


“이 절에는 사람이 안삽네?”

“예…….”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인민군들이었다.


“와 사람들이 없읍네?”


“모두 볼일 보러 갔지요.”


인민군이 청암사 수도암(靑岩寺 修道庵)쪽에서 산길을 타고 수백명이 밀어 닫친 것이었다. 헌데 인곡스님은 인민군이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도 인간이라면 산중 절에 혼자 있는 나를 어찌 해치랴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인민군은 몇 백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곡스님의 눈에는 모두 선량해 보였으며 실제로 나이도 어려서 막무가내로 사람을 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인민군은 사흘 동안 절 안팎에 머물러 있다가 예고도 없이 사라져 갔다. 부엌에서 식사 준비하는 것 이외 잠도 산에서 잤다. 아군의 공습이나 기습을 우려한 조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무서운 일은 아군과 유엔군 측에서 감지하였는지 해인사를 공습하여 초토화 시키려한 것이었다. 사천(四川) 비행장에서는 아군 비행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연일 최전선의 인민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폭격이 그들의 임무였다.


신묘년(辛卯年 · 1951년) 늦가을에 해인사 폭격이 구체화 되어 12월 18일 마침내 출격명령이 떨어졌다.


 비행대장의 이름은 김영환 중령으로서 편대를 이끌고 사천비행장을 출발했다. 그는 출발에 앞서 대원들에게,


“폭격 명령을 내가 내리기 전에는 절대로 폭탄 투하를 하지 말라.”

이러한 엄한 훈령을 내리고 해인사 상공에 도달한 편대장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폭파해서는 안된다는 굳은 신념을 끝까지 지키기로 했다.


“해인사에서 뚝 떨어진 곳에 폭탄을 투하 하자.”


다른 편대원이,


“명령을 어기면 군재에 회부됩니다.”


“군재(軍裁)는 내가 받는다. 너희는 안 다칠테니 내 명령대로 하라.”


넉 대의 아군기는 해인사에서 4㎞나 떨어진 산 중턱에 싣고 온 폭탄을 모조리 투하하고 돌아갔다. 당시 장경각에는 인곡스님이 외롭게 목탁을 울리며 기도 정진하고 있었다. 만일 폭탄이 해인사에 명중되었더라면 장경각의 팔만여 경판은 잿더미로 화했을 것이고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위시한 각 전당들도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며 인곡스님도 영원히 사라지셨을 것이다.


몇 해 뒤 김영환 중령이 해인사를 찾아와서 그 소식을 알리자 대중들은 모두 모골이 송연 했으며 인곡스님도 그 군인의 두 손을 잡고 고마움을 표했다.


“헌데 실은 그 날 이상한 일을 목격 했습니다.”


“무슨 일을요?”


“장경각에서 햇빛보다 강한 빛이 하늘로 뻗쳐 와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아! 저런….”

김중령의 애기를 듣던 스님들은 일제히 인곡스님을 쳐다본다. 그리고 소근대기를,


“인곡스님의 법광명(法光明)이예요. 까막까치가 큰스님 머리와 양 어깨에 앉는걸 보았지 않아요?”


그렇다. 그 빛은 인곡스님의 법력에 의한 빛임이 틀림이 없다. 만일 큰스님의 법광(法光)이 아니라면 대장경판의 법광일게다. 큰스님의 기도에 의한 법광의 시현(示現)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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