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48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선심일여(禪心一如)…<5>

드디어 병인년(丙寅年)의 결제일이 밝았다. 결제일은 큰절 대중스님 모두가 선원으로 올라와서 결제법문(結制法門)을 경청한다.

  인곡조실(仁谷祖室)은 그저께 큰절에 다녀왔다. 주지스님을 비롯한 노덕스님네에게 인사를 간 것이다. 조실(祖室) 자리는 엄밀히 말해서 주지스님의 윗자리인 산중법왕(山中法王)이다.

  그러나 조실이기 이전에 산중 노덕스님네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한 몸인데다 주지스님은 은사(恩師)스님이나 진배없는 어른이니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 한다.

  조실이라는 자리가 선원대중의 추대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선원대중의 추대를 받으면 큰절 노덕스님네의 추인(追認)을 받아야만 명실공히 조실이 되는 것이다.

  주지 만암(曼庵)스님이 중창불사(中創佛事)를 시작한 것은 무오년(戊午年 · 서기 1918년)이었는데 그 때 인곡조실은 본사를 떠나 선원으로 갔었고 중창불사가 10년만에 회향된 것이 바로 금년이니, 인곡조실이 10년만에 본사에 돌아온 것과 딱 들어맞는다.

  인곡조실이 10년 정진 끝에 운문선원의 조실이 된 것과 만암주지 스님이 10년간의 중창불사를 회향한 기쁨이 어쩌면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이제 백양사(白羊寺)는 폐허가 되어 초라했던 백양사가 아니다. 대웅전을 위시하여 우화루(雨花樓) · 사천왕문(四天王門) · 청운당(靑雲堂) · 범종각(梵鐘閣) 등이 말끔하게 중수되었다.

  주지실(住持室)을 디귿〔ㄷ〕자로 확장하여 주지실 외에 선방 · 객실이 마련되니 외부에서 귀빈이 찾아와도 거뜬히 접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인곡조실은 외숙이신 주지스님의 줄기찬 중창불사에 내심 몇번이고 찬사를 보냈다.

  "인곡, 자네 몇근이나 되는가?"

  만암주지의 물음이다. 여지껏 창수야 하고 해라를 해왔는데 오늘은 뜻밖에 자네라 부르신다.

  "제 근수를 달만한 저울은 갖고 계신지요?"

  "그야 3천대천세계도 충분히 달 수 있는 저울이 있지."

  인곡조실은 우렁찬 음성으로, "할"하고 일할(一喝)을 하고는,

  "이 일할은 몇근이나 됩니까?"

  이 때 경상에 놓인 죽비가 날아오더니 인곡조실의 어깨를 세차례 갈긴다.

  "어떤가? 이만 하면 내 저울맛이…"

  "동지 섣달 눈서리 보다 삼사월 서리가 더 차갑습니다. 존후 보중 하소서."

  "……?"

  "……!"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 뒤 선원의 살림에 대해 두세마디 말씀을 나누고 인곡조실은 일어섰다.

혼자서 선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곡조실은 독백(獨白)을 한다.

  "외숙은 사판승(事瓣僧)인 줄 알았는데…"

  10년간 중창불사를 해낸 외숙인지라 공부인(工夫人)이 아닌 사판승으로 굳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칼날이 매서웠다.

  하기야 인곡조실이 강원에서 경을 읽을 적에 시자(侍者)로 있으면서 만암스님이 누워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낮에는 큰절에서 강(講)하고, 또 도량 정리 하느라 중노동 하고도 밤에는 꼿꼿이 앉아 선정(禪定)에 들어 있던 모습이 그의 눈에 환히 비추인다.

  세상에서 훌륭하다 위대하다고 평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남보다 더 노력하고 닦은 공력이 있기 마련이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는 사람은 '성공'이라는 열매를 결코 얻지 못한다.

  인곡조실은 만암주지스님과 법담을 나눈 뒤 더 무섭게 정진해 나갈 것을 맘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결재날, 인곡조실의 법문을 듣기 위해 큰절대중이 모두 와서 큰방이 비좁았다. 청법대중 안에는 만암주지스님도 계셨으나 인곡조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인곡조실은 법상에 높이 앉아 잠시 양구(良久)한 후 주장자를 들어 횡으로 종으로 한번 휘두른다. 횡(橫)은 횡변시방(橫便十方)이요 종(縱), 즉 수(竪)는 수궁삼제(竪窮三際)를 가리킴이니 시방삼세(十方三世) 또는 시(時)와 공(空)을 의미한다.

  인곡조실은 주장자로 법상을 한차례 툭 치고 송(頌)하기를,

 

  多年山中覓鯨魚하여

  添得重重碍膺物터니

  暗夜精進月出東할새

  忽然擊碎虛空骨이로다  

 

  여러 해를 산중에서 고래를 찾음에

  겹겹이 가슴에 답답함만 더하더니

  어두운 밤 정진 중에 동녘에 달이 솟아오를새

  홀연히 허공의 뼈 산산히 부숴지도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접 받는 것은 사람다운 짓을 하기 때문이요, 사문(沙門)이 사문으로서 존경 받는 것은 사문이 사문답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문이 사문 답지 못하다면 어느 누가 사문을 향해 합장배례(合掌拜禮)하고 존경하겠습니까? 머리를 깍은 사문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자기 머리를 만지며 머리 깍은 본의(本意)를 반복하여 성찰하십시오.

따스한 방에 누워 잠자고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기 위해 중노릇 하는 것이 아닐진대 주야로 척량골을 곧게 세워 참구하십시오. 어느 납승이 조주(趙州)선사에게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니 조주선사가 답하시기를 '무(無)'하셨습니다. 경전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하셨는데 조주선사는 어째서 무라고 하셨는고? 하고 낮과 밤을 가리지 말고 참구하십시오. 세간(世間)의 전답(田沓)은 식량이 다함이 있거니와 일개(一箇) 무자답(無字畓)은 영겁(永劫)의 자량(資糧)입니다. 자미(滋味) 없는 가운데 자미있는 것은 천상인간(天上人間)의 제일미(第一味)니 무자일미(無字一味)로 선열위식(禪悅爲食)하기 바랍니다."

  인곡조실은 주장자로 법상을 세차례 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왔다.

  큰절로 내려온 노덕스님들은 만암주지스님의 방에 모여 인곡조실의 법어를 놓고 평강(評講)하느라 한동안 떠들썩했다.

  "본시 말수가 적은 편인데 오늘의 인곡조실은 예전의 티를 완전히 벗었어요."

  "그렇지요. 조실 자리를 아무나 하는게 아니지요."

  "헌데 허공골(虛空骨)을 부쉈단 말은 타파칠통(打破漆桶)하였단 소식이 아니겠소?"

  "바로 맞추셨구료."

  "그리고 무자일미(無字一味)로 선열위식(禪悅爲食)하라는 말씀 정말로 가슴에 와닿는 법문이요."

  노덕스님들이 총기가 좋아서 한번 들은 것을 줄줄 내쏟는 품새가 모두 공부인(工夫人)들임이 틀림이 없다.

  만암주지스님은 처음부터 시종 입을 열지 않는다. 실은 노스님들이 주지실로 모인 것은 주지스님의 평을 듣기 위함이었던 것인데 입을 떼지 않으니 조금은 서운했다.

  만암주지스님은 비록 입은 열지 않았지만 코흘리개 어린 소년이 본분납자(本分衲子)로 성장한 것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강원(講院)에는 학인들이 20여명 있었는데 강당 칠판에 인곡조실이 읊은 게송이 적혀 있어서 학인들 모두가 외우도록 강주스님의 권유가 있었다.

  그래서 어린 사미승(沙彌僧)들까지도 도량을 돌아다니며 '다년산중역경어(多年山中曆鯨魚)하야'하며 읊조리는지라 큰절은 왼통 인곡조실의 게송으로 넘쳐났다.

  특히 강원생들은 불과 10여년 전에 여기 강원에서 수학한 인곡조실인지라 학인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인 것이어서 선배스님 이상으로 존경하는 것이었다.

  큰절에서 왼통 인곡조실을 예찬하는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가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운문선원은 결제일 첫날부터 가행정진(加行精進)으로 들어갔다.

  대개의 경우 선원에서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을 하려면 대중공사에서 만장일치의 가결을 거치는 것이 상례인데 운문선원은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입선 죽비가 울려 두시간 정진하면 방선 죽비가 울리는데 인곡조실은 죽비에 관계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조실스님이 자리를 뜨지 않고 선정에 몰입하고 있으니 다른 대중들도 일어설 수가 없었으며 혹 변소에 가야할 스님은 밖으로 나왔다가 볼일 보고는 이내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는 것이었다.

  이렇게 방선(放禪) 시간이 자연스럽게 없어진채 운문선원은 한철 내내 가행정진으로 일관하였다.

  정진도량에서는 묵언(默言)이 절대적이다. 묵언과 금족(禁足)을 지상(至上)의 법규로 삼고 있는 선원(禪院)은 결제철 뿐만 아니라 산철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원은 늘 적요(寂寥)롭다 바람이 스쳐가면 풍경이 적요를 깨트리는데 풍경소리를 소음으로 듣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풍경소리는 고요로움을 더 고요롭게, 즉 더 진하게 다독거려 준다.

  운문선원은 각진국사(覺眞國師)께서 개창(開創)하신 이래 호남제일선원(湖南第一禪院)의 명예를 잘 유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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