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5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가 야 총 림 (伽 倻 叢 林)〈3〉


  효봉방장(曉峰方丈)스님과 인곡(麟谷)스님의 사이는 마치 친 사형사제지간(親 師兄師弟之間)과 다름없었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고 챙기는 품새로 보아 한산(寒山)·습득(拾得)도 저만 했을까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인곡스님은 언제나 ‘방장스님’하고 호칭하였고, 방장스님은 늘 ‘인곡스님’하고 불렀다.


 인곡스님은 천일기도에 매달리느라 주로 장경각에 있는 편이어서 방장실, 즉 염화실(拈化室)에 자주 가지 못했는데 목탁성이 그치는 때면 방장스님이 인곡스님 방으로 직접 찾아오시는 편이었다.


 염화실에는 신도들의 예방이 비교적 잦기 때문에 철 따라 먹거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방장스님은 이 음식을 손수 들고 오셔서 인곡스님에게, “이걸 먹고 힘내우”하시며 격려를 하신다. 그럴 적이면 인곡스님은 늘 미안해하며 감사히 받는다.

‘ 

 “큰스님 잡수시지 않고 가져 오셨습니까? 소승은 건강하니 견딜만합니다.”


 “아니요 아니지, 그토록 오랜 시간을 서서 정근을 하니 기력이 얼마나 갈지 걱정이요. 좀 쉬어가면서 하구려.”


 “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천일기도에 동참하는 회원이 전국에 10만명을 돌파하면서 총림의 살림살이는 튼튼한 반석위에 놓여진 듯 생기가 돌았다. 이를 지켜보며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인곡스님은 나날을 기도에만 마음을 쏟을 뿐이었다.


 “저 기도법사스님이 무심도인이시래요.”


 “헌식할 적에는 까막까치가 어깨와 머리에 앉는다는 큰스님이시래유.”

    

 기도에 동참한 신도들이 큰절에 들어서면 인곡스님을 먼저 떠올리며 한번만이라도 친견하기 위해 장경각을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총림에 몸담은 뒤 인곡스님에게도 상좌(上佐)가 몇 분 생겼다. 병술년(丙戌年)에 맏상좌를 두었는데 법명을 성관(性觀)이라 지어 주었으며 전남 장성(全南 長城)이 고향이다. 또 금년에 둔 상좌는 두 사람이니 묵산(黙山)과 수진(守眞)이며 이어서 포공(包空)과 성주(性柱)등이 제자로 들어왔다. 이들 상좌는 모두 방장스님의 배려로 얻어진 것이지 인곡스님이 직접 챙겨 생긴 것이 아니었다.


 맏상좌 성관(性觀)은 뒷날 혜암(慧庵)이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가야총림 방장화상과 원로회의 의장을 거쳐 조계종 종정까지 역임하는 선지식이 된다.


 또 성주(性柱)스님은 운문(雲門)이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어린이 불자를 위한 포교와 불교가곡(佛敎歌曲) 보급에 처음 문을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며 포공(包空)스님은 중고교생(中高敎生)을 위한 포교에 평생을 헌신하는 선구자가 되며 묵산(黙山)스님은 선수행(禪修行)으로 한길만을 걸어간다.


 이처럼 인곡스님의 제자들이 개성이 각기 달라서 지향하는 길이 다양하다.


 천일기도를 드리는 동안에는 맏상좌인 혜암(慧庵)스님이 주로 스님의 시봉을 전담하고 있다.


 무자년(戊子年)은 방장스님의 화갑(華甲)이시다. 이 해 인곡스님은 54세로서 두 분은 친형제처럼 우의가 더욱 두터워졌으며 화갑일은 두 분이 나란히 앉아서 사부대중의 하례를 받았다.


 해방된 이듬해에 스님의 상좌로 들어온 사람이 또 한사람 있다. 법명을 석주(石柱)라고 받았는데 평소 토굴로만 왕래하다가 지리산 영원사

(靈原寺) 터에 움막을 얻어 정진하더니 좋은 시은(施恩)을 얻어 중창불사를 이루게 된다.


 그리 많지 않은 제자들이지만 자기 본분을 지키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사은(師恩)에 보답하는 자세가 높이 사고도 남는다.


 기축년(己丑年) 첫 천일기도를 회향하자 사중에서나 제자들 사이에서 기도법사를 다른 젊은 스님한테 내주기를 바라는 말이 오갔다.


 “기도하겠다는 스님이면 누구나 동참하면 되지 구태여 내가 쉬어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스님께서 천일 동안 너무 고생하셨으니까 좀 쉬시라는 거지요.”


 “무슨 일이고 고생 않고 이뤄진 것이 있던가?”


 기도를 쉬시라니 도리어 역정을 내는 인곡스님이다. 인곡스님이 주야불철하고 용맹정진을 하는 것을 지켜본 젊은 측 스님들 간에 자기도 기도드리고 싶은 말뚝 신심을 낸 스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곡스님처럼 천일을 한결같이 꾸준히 용맹기도하기란 어렵고 또 어렵다.


 첫 천일기도를 회향하고 두 번째 천일기도를 입재하면서 젊은 수좌 두 스님이 기도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인곡스님이 목탁을 들었는데 젊은 스님이 원하는지라 목탁을 넘겨주었더니 있는 힘을 다해 목탁을 울리는지라 목탁성으로 인해 온 도량이 쩡쩡 울리는 것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처소인 벽안당(碧眼堂)에 나와 쉬고 있는데 방장스님이 잣 한 종지를 들고 오신다.


 “큰스님 어서 오시지요.”


 “젊은 기도법사가 생겼다구?”


 “예, 두 스님이 동참해 왔습니다.”


 “그럼 쉬엄쉬엄 하도록 해요. 노덕스님들두 스님 병날까봐 모두들 걱정이신데.”


 “예, 그렇게 할랍니다.”


 이렇게 해서 천일기도는 문자 그대로 쉬엄쉬엄 하게 되자 인곡스님은 상좌인 성관(性觀)을 불렀다.


 “오대산(五台山)을 떠나온 지 오래여서 갑자기 가고 싶구나.”


 “오대산에 말씀입니까?”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참배하려고 그런다.”


 “예, 여기서 쉬실 겸 다녀오시지요.”

 천일기도에 지칠대로 지치신 스승님을 그냥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성

관은 스님이 여행을 떠나시는 것이 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순간적인 판단이 섰기에 여행을 찬성(?)한 것이었다. 사중에 애기하고 성관은 걸망에 스승님 장삼과 본인 장삼, 그리고 갈아입을 내의 한 벌씩 넣어 가뿐히 짊어졌다.


 꼬박 25년만에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를 찾았다.


 조실(祖室)이신 한암(漢岩)큰스님은 매우 반가이 맞아 주신다.


 “큰스님 법체 강녕하셨습니까?”


 “아이구 이 뉘시요? 인곡스님이 아니시요?”


 “예, 소승 불민하여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거 무슨 말씀, 인곡스님을 앉아서 뵈니 이 노구(老軀)가 송구스럽소, 그려.”


 “아랫사람을 당황하게 하시는군요.”


 “허허 그게 아니지요. 스님께서 헌식(獻食) 하실 때마다 까막까치 떼가 몰려와서 스님의 양 어깨며 머리 위에 앉는다는 소문을 들은지 오래였소이다. 참으로 희유(希有)한 일입니다.”


 “까마귀 떼가 온 게 아니고 까마귀 떼가 있기에 그저 밥을 주었을 뿐입니다.”


 “아니 겸사의 말씀입니다. 내 일찍이 금강산이며 여기 오대산에서 스님 모시고 살은 적이 있는지라 스님의 그릇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한 바 있지요.”

 “큰스님 그만 하시지요.”


 “허허~”


 조실스님은 인곡스님의 두 손을 꼬옥 잡은채 말씀이 길었다. 진정에서 우러난 칭송이었다.


 이튿날 적멸보궁에 올라 7일기도를 입재하고 중대(中臺)에서 기거하도록 조실스님의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적멸보궁은 산 정상에 위치한 관계로 바람이 매서웠다. 그래서 보궁도 이중으로 지어졌으나 나목(裸木)의 우는 소리가 뼈 속에 파고드는 것을 왼통 막지는 못했다.


 인곡스님은 보궁 안에서 철야기도를 일주일 동안 무사히 마치자 중대에서 하루를 쉬었다. 아니 쉰 것이 아니라 하루 내내 끙끙 앓아누웠다. 밤낮 없이 7일을 용맹기도 드렸으니 무쇠덩이가 아닌 바에 어찌 병이 나지 않겠는가?


 상원사에 내려오니 조실스님이 인곡스님의 지친 모습을 보시고 극구 만류하셔서 못이기는 척하고 닷새를 쉬었다.


 “이제는 가볼랍니다. 큰스님 늘 강녕하십시요.”


 “여기 오신 김에 한철 나고 가시지요.”


 “천일기도를 맡은 몸인지라 가봐야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동안거 결재가 임박한지라 서둘러서 가아산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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