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3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가 야 총 림 (伽 倻 叢 林)〈1〉


 

 가야산(伽倻山)은 육가야시대(六伽倻時代)때부터 신성한 산으로 숭앙해 왔다.      


 가락국(駕洛國)에 처음 불교가 들어온 것은 서기 48년이요 초전조사(初傳祖師)는 허왕후(許王后)의 오라버니인 보옥조사(寶玉祖師)이시다. 보옥조사는 인도(印度) 아유타국(阿踰陀國)왕자였으며 누이 황옥공주(黃玉公主)의 혼인길에 보호자로 따라와서 불교를 전파하였던 것이다.

 

 황옥공주의 혼인은 2만리 바닷길이 막힌 머나먼 동방(東邦)의 가락국 김수로왕과의 국제결혼이었다. 2천년 전에 아름다운 로맨스를 통해 맺어진 국제결혼은 실로 전무후무한 대사건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결혼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직접 전해온 것 역시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김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 10왕자와 두 공주가 탄생하여 이 중 칠 왕자가 외숙인 보옥조사를 따라 출가하여 수행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불모산(佛母山)에 암자를 짓고 살다가 더 넒은 도량을 찾아 보옥조사와 칠 왕자는 행각에 나섰다.


 창녕(昌寧)땅 수도산(修道山)에 한동안 머물다가 다시 길을 나서서 이른 곳이 합천(陜川)땅 가야산(伽倻山)이었다.

 

 가야산 중턱에 가람을 이룩하니 스승님이 계신 곳은 법왕대(法王臺)라 하고 제자들이 사는 곳은 칠불암(七佛庵)이라 이름했다. 여기에서 3년을 안거하며 오로지 수도에 열중한 칠 왕자는 성불의 기초를 닦는 불경 공부에 열중하였다. 남방불교(南方佛敎)는 경전을 스승을 따라 외우는 방식이어서 스승의 음성을 그대로 익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가야산에서 3년을 안거한 칠 왕자 일행은 행각길에 나서서 사천(四川)땅 와룡산(臥龍山)에 들러 잠시 쉰 다음 길을 떠나 지리산 화개곡(智利山 花開谷)으로 나아가서 깊숙한 골짜기에 터를 잡으니 이 곳이 칠불사(七佛寺)였다. 여기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또 그 곁 공지(空地)에 대(臺)를 쌓으니 이 곳이 보옥대(寶玉臺)이다. 칠 왕자는 여기에서 또 3년을 살면서 도를 닦아 마침내 성불하였다.


 각설하고, 가야산은 칠 왕자가 수도하던 유서 깊은 명산으로 순응(順應)ㆍ이정(利貞) 두 분의 스님이 가람은 크게 일으키니 바로 해인사(海印寺)이다.


 해인사는 뒤에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모신 이래 법보종찰(法寶宗刹)로 거듭 나서 국내에서 첫손에 꼽히는 수행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총림(叢林)을 개설하니 초대방장(初代方丈)으로는 효봉(曉峰)선사를 모셨으며 중이 백 명이나 되는 국내 유일의 총림이 탄생한 것이다.


 인곡(麟谷)선사는 진주(晋州)에서 곧장 해인사로 들어와서 실로 오랜만에 효봉 방장스님과 해후하였다. 방장스님과는 금강산에서 여러 철을 한방에서 정진하며 우의를 다져온 사이인지라 두 분의 해후는 실로 감개무량하였다.


 "큰스님 문안드리옵니다."


"오!인곡선사."


 더는 말이 없이 두 스님은 서로 두 손을 꼬옥 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이윽고 방장스님이 먼저 입을 열으신다.


 "이거 얼마만이요, 인곡선사."


"아마 30년은 된성 싶습니다. 큰스님."


"운문선원 조실로 계시단 소식을 듣고 정말로 기뻤소이다."


"사람이 워낙 무뎌서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요? 조실이 되고도 남을 본분종사(本分宗師)신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니외다. 내 일찍이 금강산에서 스님을 한번 보고 대법기(大法器)인줄 맘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지요."


 방장스님은 인곡스님을 금강산 시절부터 매우 좋아하셨다. 과묵하고 정진만 아는 알짜 수좌인지라 훗날 대종사(大宗師)가 되리라고 점찍어 놓으셨다 한다.


 아무튼 두 스님은 옛 정을 능가하는 우의를 엮어가면서 총림의 앞날을 위해 함께 의논하고 함께 걱정해 나갔다.


 총림은 오래 오원(五院)으로 구성된다. 선원(禪院)ㆍ강원(講院)ㆍ율원(律院)ㆍ염불원(念佛院)ㆍ종무원(宗務院)이 그것이다. 가야총림은 이 오원으로 구성되어 법답게 출발하였다.


 인곡스님은 선원의 선덕(禪德)으로 추대받아 방장화상 다음자리에 앉아 마치 방장스님의 자문역처럼 방장화상의 상담자가 되었다. 효봉방장은 방장화상이 결정해야 할 사항이 생기면 인곡스님을 염화실(拈花室)로 불러들여 먼저 의논하시곤 했다.


 해방의 들뜬 분위기는 거의 가라앉은 정국(政局)이지만 좌우로 나뉜 사상논쟁이 팽배하여 아직도 시끄러운 형편인지라 국민들의 생활도 안정되지 않아서 백여명의 대중스님을 수용하기에는 재정(財政)사상이 매우 어려웠다.


 인곡스님은 재정문제로 소임자 스님들이 많은 걱정을 하는 것을 보고 한가지 묘안을 창안해 냈다.


"방장스님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생각이요?"


"ꡒ소승이 장경각(藏經閣)에서 천일기도(天日祈禱)를 모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기도드리면 대중스님들의 마음도 청순해질게고 이를 신도들에게 널리 알리면 동참대중이 자꾸 늘어날 터이니 기도금이 모아지면 선량(禪糧)을 확보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좋은 생각이시요. 허나 기도법사는 젊은스님 중에서 내도록 하는게 좋겠습니다."


"소승 아직 안 늙었습니다. 염려 마십시요."


 이리하여 원주(院主)이 법홍비구(法弘比丘)를 불러 '장경각 천일기도'를 널리 알리도록 분부하셨다. 기도 입재(入齋)는 동안거 결재일인 시월보름달이고 기도법사는 선덕이신 인곡스님이 자원하여 맡았다.


 이 천일기도 소식을 전국 각지로 널리 알리자 결재일은 대구(大邱)에서 백여명의 신도가 입재일에 몰려왔고 이어서 서울ㆍ부산ㆍ진주등지에서 신도들이 속속 연락해 오거나 직접 찾아와서 동참자가 계속 늘어났다.


 이 천일기도를 시작하고 나서 선량(禪糧)문제 뿐 아니라 총림의 안팎 살림이 차츰 윤택해지면서 활기가 넘쳐났다.


 인곡스님은 사분정근(四分精勤)에 만족하지 않고 진종일 장경각에 마치 돌장승 마냥 우뚝 서서 목탁을 울리며 기도에 용맹 정진하였다. 대중스님들도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던 것이 인곡스님의 헌신적인 용맹기도 모습을 지켜보고 모두들 새롭게 정신을 가다듬어 정진해 나갔다.


 입선(入禪)ㆍ방선(放禪)에 구애됨이 없이 장경각에서는 목탁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젊은 스님들의 감탄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으며 방장스님은 혹한에 혹 동상(凍傷)이 걸리거나 감기에 시달릴까 염려하셔서 인곡스님을 만류하는 것이지만 인곡스님의 목탁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천일기도법회로 인해 해인사를 찾아오는 사부대중의 수효가 늘어나자 젊은 대중스님들도 방선시간을 이용하여 정근에 동참하는 수효가 늘어나서 인곡스님은 잠시 쉴 수 있는 짬이 났다.


 방장스님은 인곡스님이 자기 처소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손수 찾아오셔서 얼른 손을 만져 주시며 위로하신다.


"대중들이 기도법사를 뭐라 부르는지 알고나 계시우?"


"뭐라 하는데요?"


"기도법사는 쇠말뚝이래요."


"그렇지도 못한걸요."


"또 뭐라는지 알으시우?"


 "예?"


 "미련한 곰 같대요. 저~기 북극지방에 사는 북극곰이래요. 그러니깐 추위도 아랑곳없이 목탁을 울려댄대요."


 두 스님은 약속이나 한듯 함께 환하게 웃었다.


"기도는 사분정근이 알맞어요. 한번에 두 시간씩 하루 네 차례 정근하는 것도 고되거든."


"아직 소승이 젊으니 그냥 내버려 두십시요. 도량이 좋으니 신심이 절로 나는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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