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2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해 방 기 (解 放 期) 〈7〉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도 들떴던 격정도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선승(禪僧)들의 총본산격(總本山格)인 서울 안국동(安國洞)의 선학원(禪學院)에서 모처럼 갖는 보살계산림(菩薩戒山林)에 인곡조실은 증사( 證師)로 추대를 받아 상경(上京)할 일이 생겼다.


 선학원은 선리참구원(禪理參九院)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며 여기에 중앙선원(中央禪院)이 있어 안거철에는 항상 20여명의 구참(久參)들이 운집하여 여법히 정진에 매진하고 있다.

 

 해방 기념으로 음력 섣날 초하루부터 7일간 보살계산림을 거행하는데 인곡조실은 7증사의 한분으로 초빙 받은 것이었다. 해방 전에는 용성(龍城)큰스님ㆍ만공(滿空)큰스님 등이 주로 조실로 계시면서 전국의 수좌들을 이끌어 왔는데 이제는 만공스님만이 유일하게 남아 정신적인 지주(支柱)로 계시는 형편이다.


 해방된 서울 거리는 모든 것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미군정(美軍政) 하에 놓여 있는 서울은 연일 좌우의 주도꾼 싸움으로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를 가라앉힐 방법은 과연 무엇이며 언제 우리는 자주독립국가가 될 것인가?


 각설하고, 선학원은 안국동에 있는데 모처럼의 보살계산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7일간의 법회를 회향하고 인곡조실은 이내 다보선원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정진에 임했다.


 겨울이 지나자 해남 대흥사(海南 大興寺)에서 선원을 개설했다는 낭보가 날아왔다.


 서산대사께서 임종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유촉하시기를,


 "내 일찍이 두륜산(頭崙山)을 둘러본 적이 있는데 산세가 묘하여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느니라. 내 유물일랑 두륜산에 갈무리 하는게 좋겠구나. 앞으로 3백여년 뒤에는 한수이북(漢水以北)은 불법(佛法)이 사라질 것이니 법려(法侶)들은 한수이남으로 내려가거라. 내 말을 명심하거라."


 이 유촉을 따라 서산대사의 유물은 묘향산(妙香山)에서 두륜산으로 옮겨졌으며 대사가 열반에 드신 뒤 3백여년에 한강 바로 위에 38선이 그어져 이북은 공산정권이 들어서서 불교의 자취가 희미해졌던 것이다.


 서산대산는 38선이라는 장벽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고 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을 것을 미리 아신 것이다. 두륜산을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라 하셨듯이 6.25의 와중에서도 큰 사건이나 피해가 없었으니 대사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흥사는 가람 배치로 보아 여러 문중이 각기 나누어 살았음을 쉽게 짐작케 한다. 대웅전을 모신 백설당(白雪堂)ㆍ천불전(千佛殿)을 모신 곳과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表忠祠)와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손수 짓고 만년을 보내신 대광명전(大光明殿)등으로 뉘어진 가람배치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일제 이후 이 여러 문중을 통합한 뒤 대광명전을 늘 선원으로 열게된 것이다.


 인곡조실은 다보선원에서 짊어지게 된 조실자리를 내놓기 겸, 두륜산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걸망을 짊어지고 새벽예불 뒤에 살짝 빠져 나와 두륜산으로 직행하였다. 뒤늦게 알게된 다보선원에서는 대중스님 모두가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었고 대흥사 측에서는 상하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대흥사는 초의선사(草衣禪師)에 의해 12대종사(大宗師)ㆍ12대강사(大講師)의 표주(表柱)가 도량 안에 세워진 바와 같이 임난(壬亂) 이후 많은 선지식(善知識)이 주석하시면서 혹은 참선하고 혹은 삼장(三藏)을 강설하신 수행도량이다.


 여기에서도 인곡스님은 온 산중이 조실로 모시려 해서 스님은 사양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선원 한 구석에서 조용히 좌선하는 것이 인곡스님의 바람인 것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현실이다.


 인곡스님은 해하(解夏) 후 약 일주일이 지난 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대흥사를 뒤로 하였다. 들리는 소문으로 고성(固城) 옥천사 백련암(玉泉寺 白蓮庵)에 선객스님네가 머문다는 반가운 소식이어서 스님은 뒤를 돌아볼 필요 없이 그리로 향하였다.


 우리나라 사찰 수효에 비해 선원이 턱 없이 적은 현실이어서 수좌들이 갈만한 절이 없다. 더욱이 골육상쟁(骨肉相爭)중이어서 선원을 개설한 절이 더 줄어드는 것이다.


 옥천사 백련암은 대밭에 에워싸인 아늑한 도량이긴 한데 선량(禪糧)이 부족하여 대중이 머물만한 처지가 못 되어서 열흘쯤 쉰 인곡스님은 또다시 걸망을 챙겨야 했다. 선량이 부족하다는데 굳이 방부를 드리고 싶은 배짱(?)을 본래 타고 나지 못한 인곡스님은 걸망을 지고 나오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큰 스님 지가 지고 갈랍니더."


 돌아보니 상호(相好)라는 사미승(沙彌僧)이었다.


"아니 괜찮네. 그냥 들어가게나."

 

"아닙니더. 지가 산 아래까지 바래다 드리겠심더."


 인곡스님은 고마워서 걸망을 맡겼다.

 

"언제 출가 했는가?"


"작년 가을에 왔심더."


"중노릇이 고된 작업인데 집에서 부모님 모시고 살지 않구?"

 

"5년 전에 지 어머니가 가시고 계모님이 오셨는디 매우 성질이 사나워서 견디기 힘들었심더."


"아 그랬구만…"

 

"큰 스님은 어디로 가실랍니꺼?"


"글쎄…, 내 삶이 원래무정처(元來無定處)라 금일역여시(今日亦如是)일세."


 "예…"


 못 알아들으니 '예'할 밖에 ….


 내리막길을 다 내려와서 큰절을 비껴가는 길목에 이르자 인곡스님은 걸망을 내려놓으라 했지만 상호사미는 들은 척도 않고 저만치 앞서 갈 뿐이었다.


 일주문(一柱門)을 지난 뒤 상호사미는 큰스님에게 중노릇 잘하는 법을 물어 왔다.


"중 노릇은 어떻게 하는기 잘 허는 겁니꺼?"


"원효(元曉)스님은 세속을 생각지 않는 것이 출가(出家)니라 하셨다. 세속을 생각지 않으면 뭘 생각하게 되는가? 부처님만 생각하게 되거든. 항상 부처님만 생각하며 살거라. 부처님은 우리 중생에게 바로 부모님이시지. 기쁠 적에나 슬플 적에 늘 부처님만 생각하노라면 너도 언젠가는 부처님이 되어질 것이야"


"예~큰스님…"


"그런데 자네 법명은 어느 스님이 지어 주셨는가?"


"지 은사스님이 지어 주셨심더."


"상호(相好)란 부처님의 32상(相)ㆍ80종호(種好)를 일컬음이니 자넨 틀림없이 부처님이 되겠구만."


"보시는 바와 같이 지기 아주 못생겨다 해서 부처님처럼 훌륭한 상호가 되라고 지어주신 겁니더."


"맞아, 우리 중생은 모두가 업보중생이라 불완전한 몸매를 점지 받았지. 그래서 부처님의 32상ㆍ80종호를 갖기를 원하게 되는데 부처님만 생각하면 언젠가는 좋은 상호를 갖게 될게야"


"얼굴이 지처럼 못생겨도 모두가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꺼?"


"되고 말고, 일체중생 모두가 부처될 종자인 성품을 갖고 있거든"


 옥천사에서 십여릿길을 걸어서 면사무소 소재지에 나오니 하루에 두 번씩 다니는 버스가 왔다. 인곡스님은 상호사미와 헤어져서 진주(晋州)로 향했다.


 상호사미(相好沙彌). 그는 뒤에 청담(靑潭)스님에게 입실(入室)했으며 옥천사 주지(住持)를 역임했다. 착하고 순진하여 장차 잘할 소질이 있어 보여서 인곡스님도 마음 든든했다.

 

 진주시내에는 절이 서너 군데 있는데 인곡스님은 연화사(蓮華寺)에서 하루밤 쉬기로 했다. 마침 해인사에서 나온 젊은 선객이 동숙하게 되어 해인사 소식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해인사에서는 효봉(曉峰) 큰스님을 방장화상(方丈和尙)으로 모시고 총림(叢林)을 개설하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대중들도 모두 들뜬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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