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1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해 방 기 (解 放 期) 〈6〉


   을유년(乙酉年) 8월 15일.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빈사지경에 이르렀던 한국민에게 해방(解放)이라는 낭보가 날아왔다. 일인(日人)들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였으며 해외로 징용된 우리 동포들은 속속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곡스님이 해방을 맞은 것은 백양사의 운문선원에서였다.


 월명암에서 하안거(夏安居)를 나고 산철인 가을에도 낙조(落照)를 조망하며 보냈는데 백양사에서 들려오는 소식마다 운문선원의 조실은 인고선사임이 변함없다는 것이었다. 만암(曼庵)주지 스님은 하안거 해제 무렵 염화실(拈花室)의 주인이 출타했음을 알게 되었지만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고개만 끄떡일 뿐이었다 한다.


조실은 인곡선사이니라.


 인곡스님이 자리에 있건 없건 간에 조실스님이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시는 엄한 분부셨던 것이다. 이쯤되니 속이 타는 것은 염화실을 비워 두고 온 인곡스님이었다. 그래서 겨울철에 하는 수 없이 운문선원으로 돌아 온 것이었다.


 해방(解放). 묶였다가 풀려난 것을 해방이라 한다. 무량겁을 내려오며 번뇌망상에 묶여 업풍(業風)에 휘말려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반복해온 중생이 다행히 불법을 만나 닦고 닦아서 견성오도(見性悟道)함으로써 비로서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를 해탈(解脫)이라 한다.


 해탈은 곧 해방이다. 약 40년간 일제의 쇠사슬에 꽁꽁 묶였던 우리 국민이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해방되었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으랴?


 연일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외치면서 거리를 메운 군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인곡스님은 3ㆍ1운동 당시 통도사 어구의 신평(新坪) 장터에서 일제에 항거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던 생생한 기억을 되살려 본다.


 기미만세는 풀어달라, 풀려나자 하고 외쳤으니 외치던 함성이 처절했고 오늘 해방의 함성은 이제야 풀려났다. 나는 쇠사슬에서 풀려난 자유인(自由人)이다 하는 기쁨을 담뿍 담고 있어서 마냥 즐겁기만한 함성이다.


 인곡스님은 해방의 물결을 저만치서 바라보며 발길을 남쪽으로 돌렸다. 나주(羅州) 땅 금성산 다보사(金城山 多寶寺)에서 사제(師弟)이자 도반(道伴)인 고암(古庵)스님이 젊은 선객을 보내어 초빙했기 때문이다.


 다보사는 삼국통일 후 원효(元曉)스님의 창건이라고 전해오나 이는 신라인들이 백제불교를 말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꾸며낸 기록이다. 나주(羅州)의 옛 이름은 금성(金城)이니 백제시대에 번성했던 고장임을 감안하면 금성읍의 주산(主山)인 금정산 복판에 어찌 사찰이 없었을 것인가?


 각설하고, 다보사는 예로부터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음력 3월에 영산재(靈山齋)를 크게 베푼다. 그래서 예로부터 나한도량으로 유명한 고암(古庵)스님은 여기에 선원(禪院)을 개설함으로써 수선도량(羅漢道揚)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선원은 모두가 좌선(坐禪)을 위주로 하므로 도량이 항상 적요하여 썰렁한 느낌마저 준다. 그래서 기복신앙(祈福信仰)에 젖은 신도는 아예 발길을 끊거나 뜸해지기 십상이다.


 우리 한국불교는 이씨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유생들의 노골적인 배불숭유정책(排佛崇儒政策)으로 소위 도시불교(都市佛敎)가 산중불교(山中佛敎)로 급선하게 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내려오면서 대중불교화(大衆佛敎化)했던 불교가 산중으로 밀려나면서 수행불교(修行佛敎)로 새롭게 부활하였던 것이다.


 유생들의 횡포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수행 쪽으로 굳어진 이씨조선의 불교는 포교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수행을 지향하는 스님들의 열의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무수한 도인들이 마치 깨 쏟아지듯 출현하여 유생들의 압박에도 조금도 굴함이 없이 불교계를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여기 다보사(多寶寺)는 나주읍(羅州邑)에서 가장 큰 사찰로서 고장 사람들을 불심(佛心)으로 순화시켜 왔으며 요즘은 고암(古庵)스님, 전강(田岡)스님, 금오(金烏)스님 등이 고승들을 맞아 선(禪)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가고 있는 중이다.


 신도들은 자기들끼리 선우회(禪友會)를 조직하며 수행승들을 돕기로하는 등 기복(祈福)에만 치우쳤던 신도들이 바야흐로 참선에 대해 눈을 떠가는 길목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고암스님은 인곡사형(麟谷師兄)님을 특별히 초빙하여 다보선원(多寶禪院) 조실로 추대한 것이었다. 인곡조실은 극구 반대했지만 운문선원 조실 겸 다보선원 조실이 되셔서 호남불교(湖南佛敎)를 향상시키자는데 동의하고 하는 수 없이 조실자리에 앉고 말았다.


 해방되던 을유년(乙酉年) 동안거(冬安居)에 다보선원 조실로 앉게 되자 백양사에서 석호(石虎)스님, 지종(知宗)스님이 걸망을 지고 달려 왔고 오대산 월정사(五台山 月精寺) 출신의 경운(耕雲)스님이 해인사 퇴설당(海印寺 堆雪堂)에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날아왔다.

 

 이렇게 구참납자(久參衲子)들이 십여명이나 운집하였고 젊은 수좌들도 열명이 넘었다.


 다보사는 근래에 이렇게 많은 스님들이 안거한 예는 없었다. 이에 신심이 돈독해진 읍내의 신도들은 선우회(禪友會)를 활성하는데 주력하니 청신사(淸信士)만도 8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결제일(結制日)에 새 조실스님 법문을 듣기 위해 운집한 신도는 자그만치 3백여명이나 되었는데 절 안팍을 꽉 메우고도 남았다.


 인곡조실은 법상에 높이 앉아 법당안과 마당을 한차례 휙 둘러 보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구순동안거(九旬冬安居)를 시작하는 시월보름달 입니다. 보름달이 둥글 듯이 시회대중(時會大衆)도 절안에 원만히 꽉 차서 부처를 짓고 조사(祖師)를 짓는 참선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시회대중이여 부처란 무엇이며, 중생이란 무엇인가? 화엄경에는 '일심법계(一心法界)에는 부처와 중생과 마음,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설하셨습니다. 부처가 곧 중생이요 마음이며 중생이 곧 마음이요 부처이며 마음이 곧 부처요 중생이라 이 셋은 차별이 없이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다고 하셨습니다. 사회대중이여 부처도 중생도 마음 안에 있으니 마음만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입니다. 마음을 여윈 부처가 따로 없으니 마음깨치기에 힘쓰십시요. 마음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에게 있습니다. 자기 밖, 멀리에서 구하려 말고 자기에게 있는 마음만 깨치면 우리 중생도 곧 부처인 것입니다. 중생은 자기가 본래로 가지고 있는 청정여여(淸淨如如)한 마음을 깜박 잊고 심의식 작용(心意識 作用)에 사로 잡혀 그것을 자기 마음인 양 그릇 인식한 탓에 온갖 번뇌망상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청정여여한 본래의 마음을 되찾으려면 생각을 비우십시요. 여지껏 자기 마음으로 잘못 알았던 심의식 작용을 일시에 쉬십시요. 그리하여 철저히 무심의 경지에 이르면 자기본심(本心)이 서서히 나타날 것입니다. 원각경(圓覺經)에는 '일조활연(一朝豁然)하면 환득본심(還得本心)'이라 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단박 깨치면 도리어 본심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 본심(本心)을 되찾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참선이라고 합니다. 금년 동안거에 사부대중은 본심을 되찾기 위한 참선공부에 모두 다 용맹정진(勇猛精進) 하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출가대중은 하루에 단 한번씩이라도 자기 머리를 만져 보십시요. 긴 머리 자르고 세속의 멋진 옷 대신 시커먼 먹물옷을 입은 초지(初志)를 반복하여 상기시키십시요. 출가사문(出嫁沙門)은 논밭에 나가 일하지 않고 세끼의 밥을 먹고 베틀에 앉지 않고도 속살을 가리우는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날이 날마다 우리는 시은(施恩)을 지고 살면서 철저히 정진하지 않고 허송세월 한다면 쌀 한알의 무게가 칠근(七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

 

 인곡조실(麟谷祖室)스님의 법문은 마치 냇물이 흐르듯이 조리 있고 순탄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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