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70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해 방 기 (解 放 期) 〈5〉


  해안스님은 주로 호남지방에서 많이 지냈으며 해제철에는 여러 절의 초빙을 받아 금강경이며 유마경(維摩經) ․ 범망경(梵網經)등을 강설하였다.


 인곡스님과 해안스님은 백양사 전문 강원 시절의 선후배 사이로서 매우 친숙한 사이였다.


 두 분의 성격은 정반대이다. 인곡스님은 과묵하고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육중한 반면 해안스님은 논설하기 좋아하고 몸놀림이 경쾌해서 한 눈에 총기가 드러난다.


 이렇게 정반대의 성격인데도 해안스님은 인곡스님을 무던히도 무던히도 따랐다.


 재승박덕(才勝薄德)을 염려하시는 큰 스님 네의 경책을 맘속에 깊이 담고 있는 해안스님으로서 중후한 성격의 인곡스님 같은 인물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아 온 때문에 인곡스님을 좋아하고 따랐던 것이리라.


 여기 월명암에서 도반 매곡(梅谷)스님과 후배로서 친숙했던 해안스님을 해후하였으니 월명암의 분위기는 묻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도 남으리라.


 여기 월명암은 산 아래 큰절인 내소사(來蘇寺)에 딸린 산내암자(山內庵子)이다.

 내소사는 서기 633년, 백제 성왕 때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했으며 당장(唐將) 소정방(蘇定邦)이 중창하여 원래의 이름인 소래사(蘇來寺)를 내소사(來蘇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기실 소정방장군이 중창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소장군이 백제를 무너뜨린 뒤 장군끼리의 알력으로 당나라에서 탈출하다시피 하여 우리나라에 와서 살다가 일생을 마감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건대 내소사에도 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백제의 입장에서 볼 적에는 철천지원수 이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삼한(三韓)을 석권하는데 은인인지라 신라에서 매우 우대했으니 소장군이 내소사를 중창하려 했다면 신라 조정에서 적극 협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내소사는 이조 인조(李朝 仁祖) 11년(서기 1633년)에 청민선사(靑旻禪師)가 중창했다.


 청민선사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완전 소실된 것을 천신만고(千辛萬苦)로 대웅전을 비롯한 각 전당을 중창하고 대웅전을 지을 때와 또 단청하면서의 일화가 있어 소개할까 한다.


 청민선사는 선우(善愚)라는 시동(侍童)하나를 데리고 삼칸초목을 얽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선우더러 산문 밖에 빨리 나가서 거기에 계시는 분을 모시고 오도록 명하였다.


 “그 분이 뉘신데요?”


 “이 절을 중창하실 도편수(都片手)시니라.”


 선우가 급히 나가보니 허수룸한 차림의 어른이 일주문(一柱門)에 기대고 앉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선우를 따라 절로 들어오자 청민선사는 큰절을 올리며 중창불사의 도편수를 맡아 달라고 청하니 그분은 쾌히 승낙하고 이튿날부터 산중에 널려 있는 재목을 골라 베어 나르는 것이었다.


 기둥과 대들보 그리고 서까래를 베어온 다음 마치 목침만한 토막나무를 수백 개나 다듬는 것이었다.


 이렇게 3년 동안 재목을 다듬고 토막나무를 마련하는 것을 지켜보던 선우가 토막나무 한 개를 슬쩍 훔쳐다가 감추었는데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토막나무로 공포(供包)를 쌓다가 한 개가 모자라자 매우 실망해 하면서 일을 중단하고 마는 것이었다.


 주지스님이 사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 머리가 나빠서 공포 쌓을 나무토막 한 개가 모자랍니다. 이런 주제에 거룩한 대웅전을 어찌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밧줄로 자기 목을 매어 죽으려하는 것이었다.


 이 때 선우가 놀라 감춰둔 토막나무를 가져와서 도편수에게 사죄하니 그제야 죽을 것을 단념하고 대웅전을 완공했다 한다.


 그러나 선우가 감췄던 토막나무는 부정하다 하여 쓰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도 토막나무 한 개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 도편수(都片手)의 신기(神技)를 새삼 절감(切減)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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