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68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해 방 기 (解 放 期) 〈3〉


 앞서 전강(田岡)스님을 잠시 소개했는데 내친 김에 한가지 더 얘기해 둘까 한다. 전강스님이 서른살 남짓 되었을 때 스님은 엿목판을 짊어지고 이 고을 저 고을 순행하며 엿장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해 여름안거의 반살림 시기를 맞추어 서울 대각사(大覺寺) 조실(祖室)이신 용성(龍城)선사께서 전국 각 선원으로 설문(設問)을 뛰었다.


 설문의 내용은 안수정등화(岸樹井藤話)이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한 나그네가 평원광야(平原曠野)를 혼자서 걷고 있었다. 이 때 미친 코끼리〔狂象〕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밟아 죽일 듯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젖먹은 힘까지 다 쏟아 도망갔는데 그 코끼리는 막무가내로 뒤쫓아 오는 것이었다.


 결국 지치고만 나그네는 영락없이 코끼리에 밟혀 죽게 되었는데 바로 그 때 그의 앞에 오래된 낡은 우물이 있는지라, 나그네는 우물로 뻗어 내려간 등나무를 부여잡고 우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


 미친 코끼리는 우물을 빙빙 돌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위협해 왔으며 나그네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게 되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니 우물 밑바닥에는 팔뚝만한 독사떼가 있어 나그네가 내려오면 물어 죽이겠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고 우물 사방에도 독사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위를 쳐다보니 흰쥐 검은쥐 두 마리가 번갈아 가며 나그네가 붙잡고  있는 등나무를 갉아 먹는 것이 아닌가?


 등나무를 다 갉아 먹으면 나그네는 우물 바닥으로 떨어져 독사떼의 밥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두 마리의 쥐가 등을 갉아먹으며 마침 근처에 있는 벌집을 건드리니 벌집에 고여 있던 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전후좌우의 긴박한 상황을 깜박 잊고 꿀 받아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만 나그네가 위기에서 벗어나 살아나게 되겠는가?」



 이것이 안수정등화(岸樹井藤話) 내용의 요지(要旨)이다.


 제방의 각 선원에서 30여통의 답이 대각사에 도착했는데 어느 큰스님은 ‘작야작몽(昨夜作夢)’이라 답하셨고 어떤 큰스님은 ‘광상(狂象)이다’라고 하셨으며 어떤 큰스님은 ‘상강(霜降)에 월색한(月色寒)이다’하셨다.


 하루는 조실스님이 오공중(午供中)에,


 “영신(永信)이 요즘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구나.”


 하시니 영신은 전강(田岡)스님의 법명이다. 조실스님 맞은편에서 공양을 들고 있던 설봉(雪峰)스님이 여쭙되,


 “영신은 왜 말씀하십니까?”


 “영신의 답을 듣고 싶구나.”

 “소승이 찾아볼까요? 직지사(直指寺)근처에서 엿장수하고 있다던데요.”


 “그럼 한번 찾아보아.”


 이렇게 해서 설봉스님이 전강스님을 찾아 나섰다.


 설봉스님은 먼저 직지사로 내려가서 자세히 물어본 다음 금릉군(金陵郡)의 어느 시골에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시골 마을을 샅샅히 뒤지기를 사흘 만에 어느 마을 앞에서 엿목판을 진채 가위를 치며 타령조로 엿사시오 엿사시오 하고 떠들고 있는 전강스님을 만났다.


 연령은 설봉스님이 위이지만 두분은 절친한 도반 사이였다. 둘이 한동안 두손을 부여잡고 담소를 나누다가 설봉스님이 ‘안수정등화’의 문답을 얘기하며 한마디 일러보게 하니 전강스님은 제방선원에서 보낸 답을 먼저 듣고 나서 하는 말이,


 “선방에서 모두 시은(施恩)만 축냈네 그려.”


 “그게 무슨 말이야?”


 “모두 엉터리 답이란 말이지.”


 “그럼 자네 한번 일러 보라구.”


 “정식으로 물어오면 답하지.”


 “우물 속에 갇힌 나그네가 어떻게 하면 출신활로(出身活路)를 얻겠는가?”


 엿목판을 짊어진 채 그 무거움도 잊은 전강스님이 바른 손을 번쩍 들면 외치기를,


 “달다”


 하는 것이었다. 설봉스님이 돌아가서 낮공양 중에 조실스님이 물으시자,


 “달다 하고 큰소리로 외칩디다.”


 이 말은 들으시던 조실스님은 들고 계시던 국그릇을 떨구고 말았다. 조실스님이 너무도 뜻밖의 답을 들으시는 순간 경악하시며, 국그릇을 떨군 것이었다. 시자가 수건으로 모두 닦아 드렸지만 조실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굳은 표정으로 한식경을 지난 뒤에 무릎을 툭 치시며, “과연 영신(永信)이 있었군․․․”하셨다. 영신의 답이 가장 값지다고 수긍하신 것이었다.


 그러면 설문을 던지신 용성조실(龍城祖室)스님은 무어라고 자답(自答)하셨을까?


 包瓜花穿籬出하야 臥佐痲田上이라


 박꽃이 울타리 뚫고 나와서

 삼밭 위에 누워 있도다

 

 영신(永信), 즉 전강(田岡)스님은 용성선사의 자답(自答)도 어줍잖다고 일렀다.

 안수정등화(岸樹井藤話)의 문답은 여러 해를 지나서도 논란이 계속되었고 그와 함께 전강스님의 ‘달다’하신 답에 대해서도 많은 선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아무튼 코끼리에 쫓겨 낡은 우물 속에 갇힌 나그네의 출신활로(出身活路)에 대한 문제는 곧 현재의 우리네 문제이므로 공부인(工夫人)이라면 누구나 깊이 사유해야 할 것이다.

 때는 임오년(壬午年․서기 1942년), 절기는 하안거(夏安居) 중인 유월의 더운날, 인곡(麟谷)조실은 변산(邊山) 월명암(月明庵) 선원에서 여름을 나고 있었다. 운문선원(雲門禪院)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지라 결제일을 사흘 앞두고 새벽예불 모신 뒤 장상과 발우만을 챙긴채 산길로 구암사(龜岩寺)쪽으로 내달려서 가까스로 여기에 닿았던 것이다.


 운문선원 용상방(龍象榜)에는 여전히 조실로 올라 있고 선객 너댓이 조실스님 찾으러 원근의 사찰을 뒤졌지만 소식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입승(立繩)스님은 조실스님 실종사건을 큰절에서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은폐하여 한참이 지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후문(後聞)이다.


 운문선원에서 함께 났던 도반들도 지금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선원에 몸담고 있을 것이지만 소식을 들으지는 일년이 지난 스님도 있다.


 월명암(月明庵)에는 인곡스님의 도반이 한 분 있다. 바로 매곡(梅谷)스님이다. 학명(鶴鳴)큰스님의 훈도(訓道) 속에 본분납승(本分衲僧)으로 많은 신도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매곡스님은 예전에 정혜사(定慧寺)의 만공회상(滿空會上)에서 함께 난 이래 멀리 금강산(金剛山)에서도 함께 정진하며 도반의 우의를 두터이 다진바 있다.


 인곡스님과 매곡스님은 조용한 성품이 꼭 닮았다. 말수가 적은 것도명예를 돌아보지 않는 점도 두 스님은 비슷하였다.


 인곡스님은 백양사에서 이력을 마쳤고 매곡스님은 금산사(金山寺)에서 일대시교(一大詩敎)를 이수하고 선원으로 다니며 자기 공부에 누구보다 열심이다.


 “어! 운문선원 조실스님이 아니여?”


 “월명선원 법주스님 안녕하신가?”


 “아니, 내일이 결제일인데 오늘 여기에 원일이란 말씀이여?”


 “결재일이 되었으니 큰스님 회상에 온게 아닌감.”


 “살다보니 별일 다 보겠네 그려.”


 “아무튼 한철 나고져 왔으니 방부나 받아주소.”


 “정말잉가여? 인곡당.”


 “암 정말이지.”


 “큰일 났겠네, 인곡당.”


 “뭐가 큰일나?”


 “백양사는 지금 난리가 났을 것이구만.”


 “너무 과장하지 마소. 아무 일 없을 터이니.”


 매곡스님은 걱정이 앞섰다. 만암큰스님이 노여워하실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불똥이 어디까지 튕길지,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만 인곡스님을 운문선원으로 가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곡화상, 조실 자리가 어떻길래 도망하다 시피하여 이렇게 온게야?”


 “적어도 내게는 안 어울려. 마치 머리에 맞지 않은 무거운 모자를 쓴 기분이었거든.”


 “하기야 이 산중 저 선방을 자유롭게 넘나들다가 염화실에 앉아만 있자니 답답하기도 할게야.”


 “바로 그걸세, 자유라는게 없어.”


 “그렇다면 여기루 잘 왔네, 그려.”


 “자네는 여기에 얽매이지 않은건가?”


 “나야 조실이 될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니까 얽매일 것도 없지만 상좌가 주지직에 있으니까 맘 편히 있는게지.”


 “들으니 자네도 조실로 있다던데?”


 “큰절에서들 조실로 계셔야 한다고 하더구만. 나는 아예 조실이란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했지. 조실 운운하면 이내 걸망을 싸겠다구 말일세.”


 “그래서 회주(會主)스님이니 법주(法主)스님이니 하고 부르는구만.”


 “그런 칭호도 못하게 했는데 그렇게 부름으로써 조실 칭호를 안 쓰니 그냥 봐주고 있다네. 허허.”


 조실(祖室)의 칭호. 아무나 조실이 될 수 없듯이 일단 조실이 되면 산중을 대표해야 하니 마음이 무겁기 마련이다.


 주지(住持)는 절 살림을 맡은 행정승(行政僧)의 수반이지만 조실은 그 산중의 납자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며 거느리는 법왕(法王)이다. 얼핏 보아 주지스님이 그 절의 대표인 것 같지만 그 절의 행정을 맡아하는 대표이지 산중의 대표자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방장(方丈)화상이 주지직(住持職)을 겸임한다. 말하자면 주지가 곧 방장이요 방장이 주지인 것이다. 방장화상은 한 산중의 법왕이자 행정수반(行政首班)이므로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주지스님이 곧 조실을 겸임했는데 이판(理辦)․사판(事辦)으로 나뉘면서 이판은 조실이 맡고 사판은 행정승이 맡는 제도도 확립된 것이다. 이렇게 나뉘어진 것은 아마도 일제시대 초기 부터인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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