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67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해 방 기 (解 放 期) 〈2〉


 

 "향엄지한(香嚴知閑)선사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젊은 비구였단 말씀이여. 삼장(三藏)을 이수하고 사교입선(捨敎入禪)하기 위하여 위산회상(潙山會上)을 찾아갔단 말씀이지. 위산(潙山)선사는 백장(百丈)선사의 후예로 당시 천명대중을 거느리신 방장화상(方丈和尙)이셨거든. 지한(知閑)은 방장화상에게 나아가 강당(講堂)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으로 이것이 부처요, 저것이 선(禪)이 아닙니까? 하고 자꾸 질문을 퍼붓는 것이었지만 워낙 과묵하신 방장화상은 가타부타 하지 않고 그냥 듣고만 계셨단 말씀이야. 지한의 총명의식(聰明意識)으로 떠들어대는 것에 큰스님이 어찌 사정(邪正)을 논하시겠냐 말씀이여. 며칠을 두고 까불어 대는 지한의 꼴새를 못마땅해 하고 있던 상수제자(上首弟子)인 앙산혜적(仰山慧寂)이 지한을 불러 한마디로 꾸짖되, ‘자네가 총명한다 하여 그것으로 도(道)를 논하는 것은 옳지 못해 큰스님을 그만 괴롭히고 정진이나 잘 하는게 좋겠어’라고 했어. 앙산스님은 천명대중의 상수(上首)로서 방장화상의 대를 이를 큰 그릇이거든. 뒷날 위산방장과 앙산스님의 사자지간(師資之間)에 위앙종(위仰宗)이 수립된 것을 보아도 앙산스님이 누구인가를 알만하단 말씀이여. 앙산사형(仰山師兄)의 꾸지람에 재발심한 지한비구(知閑比丘)는 바랑을 메고 산속 깊숙이 자리한 운문암(雲門庵)으로 들어가 고수정진(苦修精進)하게 되었단 말씀이여. 하루는 뜨락을 청소하는 도중 뜨락에 널려 있는 기왓장을 담넘어 대밭으로 던지는데 기왓장이 굵은 대나무에 정통으로 맞으며 뻥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지한이 타파칠통(打破漆桶)하였단 말씀이여. 그러니 말씀인데 깨치는 것은 어떤 시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여. 서장(書狀)에도 ‘발심(發心)하는 것은 선후(先後)가 있지만 오도(悟道)는 선후점차(先後漸次)가 없다’하셨단 말씀이여"

 장황한 이야기인데도 어찌나 구수하고 감칠나게 이야기 하는지 듣고 있던 대중들은 모두가 숙연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전강스님은 대단히 선객임에 틀림이 없다. 더러 주막에 들러 한 잔 하기도 하고 마음을 지나다 혹 굿놀이라도 할라치면 한데 어울려 춤을 추며 육자배기를 주욱 뽑아댄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실천자라 하여도 좋을 법하다.

 


 염화실(拈花室)은 인곡조실의 거처다. 그러나 전강스님과 고임스님에게는 무시로 출입하여도 누가 탓할 사람이 없다. 가장 가까이 지낼 수 있는 막연한 도반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고암 ․ 전강 두 스님은 한철 내내 단 한번도 염화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실스님께 폐가 될른지도 모른다 하여 삼간 것이다.


 사실 말이지 인곡조실은 서운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단에 앉아 시공(時空)을 잊고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있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올 수도 없지 않은가?


 방선(放禪)시간에도 두 스님은 포단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젊은 선객들도 지대방에서 쉬는 경우보다 큰방에 앉아 정진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는 듯 통 포단을 떠나지 않는다. 한철 내내 가행정진(加行精進)을 의논하지 않았는데도 모두들 스스로가 가행정진으로 일관했다.


 이렇게 되면 원주(院主)스님이 곤혹스러워진다. 대중운력을 해야할 적에 포단에 앉은 스님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원주스님은 염화실로 달려간다. 조실스님이 어찌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조실스님은 대중 몰래 손수 나가서 원주가 내놓는 일거리를 차근차근 해낸다. 한철 내내 조실스님은 공수간(供需間) 출입이 잦았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선객 한사람이 있었다. 용상방(龍象榜)에 화주(化主)소임으로 올라 있는 묵담(黙潭)스님이다.


 큰절 스님이라 해서 화주소임을 짊어진채 그도 가행정진으로 여름을 알차게 나고 있었다.


 방선시간에 화주스님은 대중이 먹을 음식이 바닥이 나지나 않았나 하여 가끔씩 공수간에 나온다.


 헌데 조실스님이 후원대중과 함께 찬거리를 마련하느라 일하고 있질 않은가?


 “아니? 조실스님.”


 “응? 나 여기 있수.”


 “어찌 손수 일하십니까? 조실스님.”


 “일 안해요. 잠시 거들어 드리는걸요.”


 "화주승(化主僧)이 변변치 못해서 큰스님께서 수고를 하시게 했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멀리 나다니며 짊어지고 오신 분도 계시는데 절집 안에 앉아서 이런 일도 않는다면 부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실겝니다.”


 묵담화주(黙潭化主), 담양(潭陽) 국씨(鞠氏) 집안에서 귀동자로 태어나 곱게 자란 몸으로 출가하자 국씨네 대소간 모두가 불교신자가 되어 적극 밀어준 덕으로 절에 와서도 늘 귀공자처럼 편히 지내며 수학하였다.


 경전공부를 하는 동안 노스님이신 금해(錦海)큰스님을 시봉하였는데 어찌나 잘모시는지 효손상좌(孝孫上佐)라는 칭찬이 자자하였다.


 묵담스님이 선방(禪房)으로 나다니게 된 것은 노스님이 입적(入寂)하신 훨씬 뒤의 일이지만 정진에도 철저하여 장차 우리 종문(宗門)의 대들보가 되리라고 입을 모아 칭송하여 왔다.


 운문선원(雲門禪院)은 경제적으로 너무 열악하다. 한철에 20명을 수용하기도 빠듯한 형편이어서 이번 철에는 시복(施福)이 많은 묵담스님을 화주(化主)로 추대한 것이었다.


 묵담스님은 일대시교(一大時敎)를 마친데가 설법 잘하기로 소문난 스님인만큼 고향인 담양(潭陽)은 물론이고 전남북 여러도시에 스님을 숭앙하는 신도들이 많아서 화주소임을 충실히 수행에 오고 있는 중이다.


 조실스님과 묵담스님은 가까운 문중은 아니지만 만암큰스님을 중심으로 따지자면 사형사제지간(師兄師弟之間)이 된다. 이보다 한 산중에서 중노릇을 시작한 인연을 두 스님은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다.


 또 잔잔한 잔물결 같으면서도 과묵한 인곡조실을 묵담스님은 학인시절부터 못내 존경해 왔으며 결재날에 방을 짤적에 화주소임으로 조실스님이 직접 추천하였는데 묵담스님 역시 사양하지 않고 선뜻 받아들였던 것이다.


 묵담스님은 항상 존경해 온 선배께서 조실로 계시게 되자 딴 선방은 아예 생각할 필요 조차 없이 선뜻 운문선원으로 올라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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