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48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선심일여(禪心一如)…<4>

 60여명의 정진대중은 오후불식(午後不食)과 함께 한철을 묵언(默言)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할 것을 결재날에 만장일치로 결의하여 90일 내내 누구 한사람도 낙오자 없이 여일히 정진하였다.

  용성큰스님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정진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한편 역경사업(譯經事業)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다.

  인곡당은 한철을 이렇게 잘 지내자 스승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이 더욱 우러나서 스승님에 못지 않은 수행자가 되리라는 마음이 나날이 굳어져 갔다.

  헌데 해제 후 망월사에서는 보살계산림(菩薩戒山林)을 7월 하순에 거행했는데 전계아사리(傳戒阿 梨)는 용성큰스님, 갈마아사리( 磨阿 梨)는 운봉(雲峰)스님, 교수아사리(敎授阿 梨)는 석우(石友)스님이고 유나(維那)는 인곡당(仁谷堂)이 맡았다.

  을축년(乙丑年)의 여름은 지난 경신년(庚申年)에 이어 비가 많이 내려 전국이 물난리를 겪었다. 그러나 망월사는 산중에 높이 앉아 있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런데 뚝섬 봉은사(奉恩寺)의 주지인 청호(晴湖)스님은 큰비로 한강물이 넘쳐 상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과 가축이 한데 엉켜 떠내려 오자 많은 상(賞)을 걸고 사람들을 건져냈는데 이때 무려 7백여명이 목숨을 건졌다.

  청호주지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쌀 수천석을 상으로 주었으며 건져낸 이재민 역시 스님이 모두 먹여 살렸다. 그 때 구출된 사람들은 모두들 청호주지를 생불(生佛)이라고 추앙해 마지 않았다.

  각설하고, 망월사에서 여름과 겨울을 난 인곡당은 병인년(丙寅年) 봄에 실로 10년 만에 출가본사(出家本寺)인 백양사(白羊寺)에 내려갔다.

  이때 외숙이신 만암(曼庵)스님은 큰절 주지로 계셨는데 춘추는 51세였다. 만암스님은 친상좌나 다름없는 인곡당이 천근 보다도 더 무거운 본분납승(本分衲僧)이 되어 돌아온 것을 매우 기특히 여기시고 진심으로 기뻐하신다.

  "네가 용성스님에게 입실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잘한 일이다."

  "큰스님께 상의 말씀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다. 스승을 택하는 일은 자기 주관대로 결행함이 옳은 일이니라."

  "너그러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왕 왔으니 운문선원(雲門禪院)에서 한철이라도 나려무나. 선객이 제법 모인다만 수용을 넉넉히 못해 주어 안타깝기 그지없는 실정이다."

  인곡당은 큰절에서 이틀을 쉬었는데 선원 수좌들 네명이 인곡당을 맞이하려고 내려왔다. 그들은 인곡당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하고는 선원으로 올라가기를 간청한다.

  "저희가 모시러 왔습니다."

  인곡당의 걸망을 한 선객이 짊어지고 앞장 선다.

  자의(自意) 타의(他意)를 따질 것 없이 이렇게 하여 인곡당은 운문선원으로 올라왔다.

  이튿날 아침공양 끝에 대중공사가 있었다. 지난 동안거 때 입승(立繩)을 맡았던 수좌가 대중공사를 붙인 것이다.

  "대중스님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난 동안거 때 염화실(拈花室)의 조실스님이 안계셔서 대중스님 모두가 서운해 하셨는데 이번에 용성큰스님의 법을 받으신 인곡(仁谷)선사께서 본사에 오셨기로 저희가 내려가서 모셔왔습니다. 이번 하안거에 인곡선사를 조실스님으로 모셨으면 합니다만 대중스님네 의향은 어떠신지요?"

  "대환영입니다."

  "대찬성입니다."

  대중들이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던지는 말마다 찬성이요, 환영이었다.

  "스님네 모두가 환영하고 찬성하시니 그럼 인곡선사를 조실로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입승은 장삼을 입고 죽비를 경상에 얹어 인곡당 앞으로 정중이 놓고는 큰절을 올린다. 이어 대중들도 모두 일어나서 자기 자리에서 삼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진행되는 동안 인곡당은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대중스님의 절까지 받고서야 마지못해 짤막하게 한마디 한다.

  "산승(山僧)은 여러분과 동수도반(同修道伴)의 자격으로 대중스님 모시고 한철을 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인곡당은 대중의 권유에 못이겨 염화실(拈花室)을 처소로 쓰게 되었다.

  조실 자리를 일찍이 바란 적이 없으므로 인곡당의 운문선원 생활은 산철임에도 대중과 함께 하루 여덟시간의 좌선으로 일관하였다.

  산철에 이미 20여명의 정진대중이 운집한지라 결제에 임박하여 찾아온 선객들은 방부를 드리지 못하고 되돌아 가야 했다. 운문선원의 대중 수용 능력은 고작 십여명에 불과한데 인곡조실(仁谷祖室)이 계시다는 소문이 널리 나자 산철에 20여명의 대중이 모인 것이다.

  절집에 이런 말이 있다.

  "오는 사람 막지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마라"고.

  허나 운문선원은 위의 잠구(緘句)를 따르지 못하는 아픔이 있다. 경제사정으로 인해서다.

  큰절에서 무던히도 애를 써서 한철에 많으면 15,6명의 납승을 수용해왔는데 올 여름철은 결제 한달 전에 25명이 찾아왔으니 선원살림을 맡은 원주(院主)스님은 큰절 종무소에 내려가서 핀잔 깨나 듣고 올라왔었다. 대중 수용문제로 해마다 원주스님과 종무소 측은 티격태격 해오긴 했지만 십여명이나 초과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대중이 많이 모이면 조실스님이 후덕(厚德)한 탓이라 하고 대중이 적게 모이면 조실스님의 역량 탓이라고 입방아를 찧는 부자절이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금년처럼 초만원을 이룬데에는 인곡조실의 덕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과묵하면서도 누가 물어오면 비교적 자세히 일러주는 '자상한 성품'을 지닌 인곡조실.

오직 정진 하나로 승부하는 '바위덩이 수좌'의 철저함을 선객들의 눈이 놓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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