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64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운 문 암 괘 석(雲 門 庵 掛 錫) 〈5〉


인곡당이 백양사(白羊寺)에 다시 괘석(掛錫)한 것은 스님의 나이 45세 때인 기묘년(己卯年 · 1939년)의 봄이었다.


 천산(千山)의 눈을 밟으며 철새로서의 나래를 맘껏 폈던 지난 날을 회고할 겨를도 없이 인곡스님에게는 또 다시 운문선원 조실(雲門禪院 祖室)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큰절에 계신 만암큰스님은 화갑(華甲)을 3년 전에 맞았으니 올해가 64세이시다. 백양사에 당도하여 큰스님을 찾아뵈니 전에 없이 미소마저 띠시며 반색을 하신다.


 “인곡이 왔구나.”


 “예.”


 인곡당도 이제는 어린애는 물론 아니고 젊은이도 아닌 장년(壯年)의 중후한 선지식(善知識)이다. 그래도 만암큰스님은 생질인지라 말씀을 놓아 하시지만 그렇다고 저 아랫사람 취급을 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큰스님 화갑 때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문(沙門)이 무슨 회갑이란 말이냐? 여기 대중들과 함께 조촐히 지냈다.”


 “고향에서 아무도 안 오셨던가요?”


 “응, 그래 내가 오지 말랬다. 그 대신 초겨울에 내가 한바퀴 돌아왔거든.”


 “문수사(文殊寺) 말씀인가요?”


 “나간 김에 영광(靈光)에도 갔었다. 네 모친은 다 늙으셨더구나.”


 “아직 살아 계시구만요?”


 “네가 도인스님 되었다 했더니 매우 흡족해 하시더구나.”


 “형님도 보셨는가요?”


 “네 형은 읍으로 이사를 갔는데 네 모친은 고행을 떠나기 싫다며 혼자 남아서 사시더라.”


 “형님이 어머니를 버리고 갔군요.”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읍으로 나갔다는 구나.”


 외숙이신 만암큰스님에게 출가 이후 처음으로 고향 소식을 들었다. 14세에 출가하여 이제 45세이니 고향을 떠난지 31년째가 된다. 고행의 풍경이 아스라이 뇌리를 스쳐간다. 지금의 고향과 현저히 다를테니 그저 맘 속의 고향일 뿐이다.


 “이번에 너를 굳이 불러들인 것은 운문선원(雲門禪院)을 더 알차게 하고져 함이니라. 우리나라 사찰도 중국처럼 총림제도(叢林制度)로 바꿔서 승려들의 교육과 수행에 더욱 힘써야 하겠기에 우리 백양사를 총림으로 그 격을 높이려 한다. 만일 총림으로 만든다면 선원(禪院)은 참선도량으로 강원(講院)은 내외전(內外典)을 이수하는 교육장으로 함은 물론이고 큰절에 염불원(念佛院)을 시설하여 노덕스님들이 정토업(淨土業)을 닦도록 하고 청류암(淸流庵)에 율원(律院)을 두어 계율(戒律)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를 하도록 할 계획이다.”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그래서 말인데 인곡선사가 선원을 맡아서 본분납승(本分衲僧)을 제접(提接)하는게 좋을 것 같아 부른 것이니라.”


 “저는 아직․․․”


 “그게 무슨 말인고? 십여년 전에 이미 조실이 되었거늘!”


 “․․․․․․․”


 인곡스님은 외숙의 명령에 가까운 말씀에 거역할 수조차 없었다.


 “며칠 큰절에서 쉬었다가 선원으로 올라가도록 하지.”


 “․․․․․․․”


 “아 참! 총림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 총림은 고불총림(古佛叢林)이라 할 생각인데 조실스님 생각은 어떠신가?”


 “예? 예~ 고불총림, 좋은 이름입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을 거듭하여 작정한 것이니 인곡도 동참해야 하는 것이니라.”


 “예.”

 제방선원(諸方禪院)에서는 선덕(禪德)스님으로 통하는 중진급 선승인데 외숙 앞에서는 예전처럼 어린애가 되어 버리는 인곡당이었다.


 이리하여 사흘 뒤 선원대중 다섯명이 내려와서 인곡스님을 모셔가니 곧바로 조실스님 처소인 염화실(拈花室)에 걸망을 내려놓았다.


 고불총림(古佛叢林), 이는 만암(曼庵)큰스님의 염원이다. 평생을 중노릇하며 꿈꾸어온 ‘불교의 유토피아’다.


 세상사람이 꿈꾸는 이른바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한다. 무릉도원은 즐거움만이 있고 온갖 괴로움 따위는 아예 없으며 사시사철이 복사꽃 피는 봄만이 있는 곳이라 한다.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들은 늙거나 병들지를 않으며 자신의 원에 따라 수백세, 또는 수천세를 산다고 한다. 괴로움이 없고 오래사는 곳을 세상사람들은 무릉도원이라 하여 그리워하며 찾아가기를 갈망한다.


 헌데 만암큰스님이 오랫동안 꿈꾸어 온 불교의 이상세계(理想世界)는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곳인가?


 불교는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을 지상(至上)의 목표로 하는 바, 고불 총림은 수행도량(修行道揚)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곳 어느 사찰이든 수행도량 아닌 곳이 있던가 하고 반문하겠지만 고불총림은 외모 뿐만이 아니라 분명히 내실있는 수행도량을 말한다.


 참선하고자 하는 스님은 선원(禪院)에서 여법히 정진하고 내외전(內外典)을 이수해야할 스님은 전문강원(專門講院)에서 학문을 연마한다. 연령이 많아지면 참선이나 경전 연구에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스님을 위하여 염불원(念佛院)을 설치하는 것이다. 물론 젊은 스님으로서도 정토업(淨土業)을 닦기를 원하면 염불원에서 수행정진하는 것도 무방하다.


 여기에 계율(戒律)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는 스님은 율원(律院)에 들어가 본격적인 연구를 한다. 계(戒)의 중요함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불타(佛陀)께서 임종에 이르시자 아난(阿難)이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리까?”


 부처님은 짤막하게 말씀 하시기를,


 “이계위사(以戒爲師)니라.”


 즉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셨다. 계는 우리 납승들에게 바로 스승이신 것이다. 계율을 등한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사람은 마치 사공 없는 배와 같아서 결코 성불(成佛)이라서 열매를 손에 쥘 수가 없는 것이다.


 이조 오백년동안 유교(儒敎)를 앞세운 위정자(爲政者)들이 스님들을 배척하고 압박을 가하여 도시에서 산중을 내쫓은 탓으로 스님들은 계율을 호지(護持)할 수 없게 하였다.


 그래서 계율에 대한 연구는 고사하고 사문들이 계율을 등져야 하는 법난(法亂)을 만난 것이다. 그리하여 사문들의 대부분이 계율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왔던 것이다.


 중국에서 발생한 총림제도(叢林制度)가 선원 ․ 강원 ․ 율원 ․ 염불원 그리고 사무를 맡는 종무원(宗務院)을 합하여 오원(五院)이 있었다.


 만암큰스님은 중국의 총림제도가 우리나라에도 널리 보급되어 명실공히 수행가풍이 확립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셨다. 재정적으로 다른 본산(本山)에 비해 취약하긴 하지만 총림제도를 하루 속히 확립하는 것이 불교의 활로(活路)라고 확신한 나머지 인곡을 운문선원 조실로 재차 영입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이라 하여 선(禪)과 교(敎)를 쌍으로 닦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는다. 선과 교의 어느 한 쪽으로 기울임이 없이 닦아 나간다.


 그래서 새로 입문한 스님은 먼저 교학(敎學)을 이수하는데 교학을 가르치는 기관을 전문강원이라 하며 사찰의 형편에 따라 선원과 강원을 모두 두기도 하고 또는 선원과 강원 중 한 가지만 운영하기도 한다.


 아무튼 납승은 중이 되면 교학을 의무적으로 이수하고 그 다음으로 사교입선(捨敎入禪)하여 선수행(禪修行)을 하는 길이 정도(正道)인 것이다.


 총림이 아니라 해도 큰절에는 선원, 강원, 염불원 등이 의례히 있어 왔다. 그런데 구태여 총림이란 제도를 확립하려는 것은 오원(五院)을 모두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수행으로 일관하고자 함이다. 자기 능력과 취향에 따라 오원 중어는 한 원(院)으로 들어가 수행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출가 사문의 요제(要諦)인 것이다.


 운문선원은 인곡조실을 모심으로 해서 수좌들의 발길이 잦아지게 되었다.

 Copyright (C)  2001. Daegak.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