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63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운 문 암 괘 석(雲 門 庵 掛 錫) 〈4〉


범어사는 성월선사의 노력으로 각방(各房) 재산을 통합한 5천석으로 운영하여 각방 별로 공양하던 것을 대중공양을 바꾸고 대중선량(大衆禪糧) 전량을 사중에서 충당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 남는 재산으로 젊은 승려들의 교육에, 또 각 지방의 포교당 건립에 사용했고 비밀리에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그래서 성월선사는 주지직을 후학에게 넘겨준 뒤에도 재정 문제만은 철저히 스스로 영위해 나갔다.


 이러한 분위기의 범어사는 문자 그대로 수행도량으로써 손색이 없었다.


 인곡당은 선원으로 나온 뒤 장좌불와(長坐不臥)는 기본이고 또 갖가지 선행을 해왔다.


 그 첫째가 물에 담가 놓은 빨래감을 본인은 물론 대중 몰래 세탁하는 일이었다.


 선원에서는 6일이 세탁일이다. 6일․16일․26일, 이 세 6일에 세탁하는데 세탁물을 담가 놓고 빨지 않은 것을 인곡당은 대중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빨아 놓곤 하기를 다반사로 하였다.


 그 둘째는 짚신 삼는 일이다. 일제 초기에는 고무신이 그리 흔치 않아서 선객들은 예전대로 짚신을 삼아 신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혹 짚신이 헤진 것을 보면 인곡당은 가만히 뒷방으로 나가 짚신을 삼아서 낡아 헤진 짚신과 살짝 바꿔 놓는다.


 짚신 주인은 새 짚신을 신으면서 밀행(密行)의 주인공에게 내심 감사함은 물론이다.


 또 행각에 나서는 도반이 짚신을 필요로 할 적에도 인곡당은 미리 삼아놓은 짚신을 미소를 띄우며 제공하는 예가 비일비재(非一非再)였다.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밀행제일(密行第一)로 손꼽힌 제자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아들 나후라존자(羅喉羅尊者)였다.


 가장 호강하게 살아갈 것으로 여겨진 나후라존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한 선행을 많이 하였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한다.


 한번은 나후라가 용번을 보러 변소를 갔다가 자기 방으로 갔더니 다른 비구가 먼저 와 있었다.


 라후라는 그 비구의 정진에 방해될까하여 다시 변소로 돌아가서 마침 쏟아지는 비를 피하고 있었다.


 이 때 큰 뱀 한 마리가 비를 피하여 변소로 와서 한켠에 도사리고 있었는데 어린 나후라가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 잡아먹고 싶은 욕심이 나서 라후라에게로 살며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 때 세존께서 나후라가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아시고 손수 달려가서 구해주시며 물으셨다.


 “비도 많이 내리는데 너는 어미 변소에 쭈그리고 앉아 있단 말이냐?”


 “예, 제가 용변을 보고 방으로 돌아가 보니 다른 비구스님이 방안에 계시기에 선정(禪定)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여기에 나와 있었습니다.”


 자기 방을 차지하고 있는 비구의 공부에 방해될까 해서 그냥 양보하고 변소로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후라는 은밀한 선행을 잘 했다. 그래서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는 청호를 얻은 것이다.


 세상사람은 거의가 자기를 내세우며 산다. 내가 이렇게 똑똑하다느니 유식하고 훌륭함을 과시하려 든다.


 각기 자존심을 갖고 살아가지만 수행인은 그 자존심을 없애는데 주력한다. 자존심은 지나치면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고 간다.


 자존심을 ‘아만(我慢)’이라 하고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이라 했다.


 우리 중생은 누구나 성불(成佛)의 자리를 향해 꾸준히 달려가고 있다.


 성불의 자리는 어느 일정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누구나 도전하여 달려가면 도달할 수 있는 영광의 보좌(寶座)인 것이다.


 그런데 그 보좌를 향해 달려가는데 있어 가장 방해로운 것 중 하나가 자존심이라는 아상(我相)인 것이다.


 나거니 하는 아상을 버리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고 사상누각(沙上樓閣)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삼계대사(三界大師)이시고 사생자부(四生慈父)이신 세존은 나의 친아버지시다. 나는 부처님의 아들이니 내가 제일이다.”


 만일 나후라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그는 밀행(密行)보다도 아만심(我慢心)으로 거만해진 볼썽 사나운 모습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모든 중생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시고 모든 중생을 위해 헌신하시는 중생의 어버이신데 내가 만일 수행을 잘못하여 일거일동에 모자람이 드러난다면 부처님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매사에 있어 조심하고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삼가고 성찰하면서 남보다 더 선행을 많이 하고 자존심을 죽였기에 은밀한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인곡당은 나후라의 밀행(密行)에 대해 매우 좋아했고 자신도 나후라존자의 행실을 본받아 실천하기에 힘써 왔음은 물론이다.


 인곡당은 외숙이신 백양사(白羊寺)의 만암(曼庵)스님을 단지 외숙이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른의 행실이 중노릇의 표본이 되고 모범이 되기에 좋아하고 존경해 오는 터이다.


 만암스님은 인곡당에게 있어 부처님과 같이 존재임을 늘 맘 속에 담고 있다.


 만암스님의 주선으로 출가하였고 또 삼장(三臧)을 이수하고 사교입선(捨敎入禪)하여 선방생활로 일관하고 있음을 항상 감사하고 있다.


 내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면 만암스님에게 누(累)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인곡당은 늘 뼈에 새기며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만암스님은 인곡당에게 스승님의 존재이다.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 보아도 언행(言行)이 만암스님만큼 분명한 스님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인곡당은 체험적으로 인사하고 있다.


 ‘언행일치(言行一致)’


 말과 행동이 같아야 사표(師表)가 되는 것이다.


 항간에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이가 너무도 많음을 본다. 자기가 말한 것처럼 행동으로 실천하는 이가 군자(君子)요, 수행자(修行者)다.


 인곡당은 무인년(戊寅年) 동안거를 끝으로 제방행각을 잠시 접기로 했다.


 기묘년(己卯年) 봄에 잠시 백양사를 들러 만암큰스님을 뵈러 갔는데 큰스님이 만류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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