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61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운 문 암 괘 석(雲 門 庵 掛 錫) 〈2〉


 그런데 아도화상이 숨어 지낸 모례(毛禮)는 청신사(淸信士)인데  그 당시는 모례라 부른 것이 아니라 ‘털예’라고 불렀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왔을 적에는 신라에 한문(漢文)이 아직 보급되지 않았다. 털예란 말은 순수한 신라 말로서 한문이 보급된 뒤 털예를 모례(毛禮)라 기술한 것이다.


 말하자면 털은 한문 모자(毛字)의 뜻을 딴 것이고 예는 한문 음대로 예자(禮字)를 취한 것이다.


 털예네 집에 가면 스님을 만나 뵐 수 있고 불법을 들을 수 있었으므로 뒷날 불교가 공인(公認) 된 뒤 가람(伽藍)을 절이라 부르게 된 연유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털예’가 뒷날 ‘절에’로 변한 것이니 '절에 간다' 이 말은 ‘털예네 집에 간다’가 변화된 것이다.


 인곡당은 태조선원에서 동안거를 난 후 을해년(乙亥年) 하안거(夏安居)는 문경(聞慶) 땅 대승사(大乘寺)로 가서 났다.


 이 절은 사불산(四佛山) 중턱에 자리한 절로서 신라 진평왕 9년(서기 587년)에 창건되었다.


 산 이름이 사불산인 것은 엄청나게 큰 바위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산 중허리에 내려앉았다.


 사면에 조각 된 불상은 범상한 인간이 새긴 것이 아니라 천인(天人)이 새겨져 이 산에 내려놓은 것이라 한다.


 이 사면석불(四面石佛)의 출현으로 신비감이 넘쳐흐른 덕에 나라에서 대승사(大乘寺)를 창건한 이래로 산정(山頂)의 묘적암(妙寂庵)과 큰절 뒤 골짜기의 윤필암(潤筆庵) 등 전국에서 첫 손에 꼽히는 암자가 속속 창건되어 수선납자(修禪衲子)의 안식처가 되어 왔다.


 윤필암은 원효(元曉) ․ 의상(義湘)과 함께 삼성(三聖)으로 일컬어지는 윤필거사(尹弼居士)가 처음 가람을 짓고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윤필거사는 사전(史傳)에 기록이 없음에도 전국에 자취가 남아 있으니 과연 누구인지 궁금하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거지 앙초였던 사복성자(蛇腹聖者)를 지칭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복성자는 실존인물로 사전(史傳)에 실려 있는 성자(聖子)로서 위대한 인물이다.


 우리 역사에는 입과 입을 통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문자상 기록으로 전해오지 않은 인물이나 사실들이 많다.


 기록만 따지는 사람들은 구전(口傳)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록으로는 전하지 않으나 실제의 사실이나 인물들이 허다하게 구전되어 온다


 물론 구전사실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무조건 다 버리는 것은 우자(愚者)의 판단이다.


 앞서 언급한 윤필거사(尹弼居士)의 경우 구전으로 내려오는데 역사서(歷史書)에 구체적인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정말 안타깝다.


 전국 도처에 윤필거사가 창건했다는 윤필암이 꽤 많은데 한문으로 윤필암(尹弼庵) ․ 윤필암(潤筆庵)의 두 가지로 기록된 것이 주목된다.


 윤필(尹弼)과 윤필(潤筆)은 혹 거사의 별호(別號)는 아닐런지? 말하자면 학문이 고매하거나 붓글씨를 잘 써서 붙여진 별호는 아닌가 여겨진다.


 또한 원효 ․ 의상 두 성사(聖師)와 어울린 분이라면 두 성사의 기록에 한번쯤은 올라 있어야 하는데 기록상으로 전해 오지 않으니 안타깝다.


 앞서 말한 사복성자(蛇腹聖者)는 원효스님 당시에 거지들의 우두머리였는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칠 적에 간자(間子)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낸 거지들의 왕초였다.


 사복은 부하 거지들을 간자(요즘의 간첩)로 훈련시켜 백제와 고구려 파견, 그쪽 동정을 샅샅이 알아오도록 하여 두 나라를 거꾸러뜨리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진 두 사복은 원효와 함께 전국을 순례하며 수행하는 한편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무하는데 힘썼다.


 사복의 어머니가 죽자 원효를 청하여 시다림(尸多林)을 부탁하기를,

 “가섭불(迦葉佛) 당시 우리 함께 경전을 배울 적에 경전 싣고 다니던 암소가 내 어머니일세. 화상도 그 인연을 감안하여 염불해주는 것도 무방하겠기에 화상을 부른 것일세.”


 이 말을 수긍한 원효는 시체 앞에 앉아서 요령을 흔들며 법문 하기를,


 막생혜(寞生兮)여 기고(其苦)로다.

 막사혜(寞死兮)여 기고(其苦)로다.


 태어나지 말지어다 그 괴로움이로다

 죽지 말지어다 그 괴로움이로다.


 하니 사복이 원효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무슨 말이 그리 긴가? 생사개고(生死皆苦)라 하지.”


 생사가 다 괴로움이라는 짤막한 법문이다. 원효는 열자법문인데 반해 사복은 넉자법문을 하였다.


 이 짤막한 사례로 보아 두 분의 인품과 공부가 어떤가를 다소나마 짐작할 만 하리라.


 대승사 산정에 자리한 묘적암(妙寂庵)은 고려 말엽에 나옹(懶翁)선사께서 출가하신 절로서 수선납자(修禪衲子)가 끊이지 않고 안거하는 도량이다.


 인곡당은 점심공양 뒤 도반을 따라 사면석불(四面石佛)도 배관(拜觀)했고 묘적암도 여러차례 올랐다.


 참선하는 사람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무어냐면 바로 건강문제다.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니 운동 부족은 당연(?)한 결과다.


 이 운동 부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선객들은 등산을 자주 한다. 산길을 오르내리며 화두를 챙기는 것을 행선(行禪)이라 한다.


 선객들은 이 행선을 통해 공부도 더 알차게 하고 건강에 대한 염려를 덜곤 하는 것이다.


 좌선(坐禪)에서 오는 망상과 혼침(昏沈)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길은 다름이 아닌 행선인 것이다.


 행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화두가 순일히 잡히겠느냐고 하겠지만 행선을 해 본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산길을 걸으면 우선 공기가 맑으니 가슴 속이 시원해지고 솔숲을 후비고 지나가며 내는 소슬한 바람소리가 적요를 더 짙게해 준다.


 오르막길을 오를 적에도 좋고 내리막길을 질풍같이 내려올 적에도 가슴이 확 트여서 화두 하나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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