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59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답파천산설(踏破千山雪) …<9>

대중들 중 노덕스님네나 중견스님들은 공양타령을 거의 하지 않지만 2, 30대 젊은 층 선객들은 끼니 때마다 불평을 쏟아낸다.

“이밥 한번 실컷 먹어봤음 좋겠구먼.”

“허! 이밥이라니? 난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는게 소원이외다.”

“이봐요, 배부른 말씀 작작들 하소. 강냉이밥이라도 발우에 가득 받아 본지가 언제였수?”

미감(米監)스님이 식량을 공양주에게 내줄 적에 쌀, 보리, 수수, 옥수수 등을 적당히 배합되도록 조절하는데 한사람에 서홉을 기준으로 한다. 그런데 서홉밥이 개개인에게 전량 돌아간다면 그도 천만 다행이다. 객스님이나 길손이 거의 매일 들이닥치니 몇 그릇 뜨고나면 대중 몫은 늘 감반(減飯)이다. 30명 대중에게 25인분 공양이 들어오면 5인분을 감반으로 충당해야 하니 끼니 때마다 ‘감반이요’ 하고 두 번 세 번 밥통을 돌리니 개개인에 돌아온 몫은 늘 반그릇 정도다. 그래서 배부르도록 실컷 먹어보기가 소원인 것은 전체 대중스님들의 한결같은 목마름이다. 이렇게 세끼 공양구가 부실하니 진종일 척량골을 꼿꼿이 세우고 좌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말뚝처럼 포단 위에서 떠나지 않고 버티는 이가 있다면 이는 순전히 정신적인 인내심과 좌선공부에 익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서홉밥 먹고 못 버텨.”

이게 제방선원에 떠도는 유행어다. 이렇게 공양구(供養具)가 부실한데도 오대산에 선객들이 운집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과 오대산이 갖고 있는 깊은 산중이라는 장점이 상당히 작용하겠지만 한암조실(漢岩祖室)스님의 법력(法力)이 가장 크고 진한 이유라 하겠다. 조실스님에게서 풍기는 법력의 향훈. 일찍이 삼장(三將)을 이수(履修)하시고 사교입선(捨敎入禪)항 수선(修禪)으로 일관하여온 공부의 힘을 법력(法力)이라 하거니와 조심스님에게는 다른 이가 따라갈 수 없는 법력이 있다. 거기에 모나지 않고 원만한 성격이어서 덕행(德行)이 남다르시다. 선머슴아인 행자(行者)가 공양을 지었는데 쌀은 겨울 셀 정도이고 수수, 보리밥, 옥수수가 가미된 밥이 죽밥이었다. 젊은 수좌들은 고실고실한 밥을 좋아하는데 물대중을 잘못하여 죽밥이 되고만 것이다. 그냥 잘된 밥일지라도 잡곡밥인지라 짜증을 낼 만한데 죽밥이 되었으니 젊은이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수 밖에,

“아 이거 죽이야? 밥이야?”

얼마나 화가 났던지 수저로 밥을 저으면서 큰소리로 외쳐댔다. 어간에 앉아 계신 조실스님이 얼른 받아 말씀하기를,

“극케 밥이지”

극케란 경상도 토종말로서 ‘그러니까’라는 단어다. ‘죽일 수도 있고 밥일 수도 있으니까 밥이라 한다’는 말씀이다.

조실스님의 이 말씀에 대중들은 입을 꽉봉하고 말았다.밥이란 물을 적당히 부어 끓이면 밥이 되고 물을 과도하게 부어 끓이면 죽이 된다. 밥 지으려다 물의 양이 많은 탓으로 죽이 되는 것이므로 탓하지 말고 먹어야 하는데 불평을 앞세운다면 이는 분명 수행인의 자세가 아닌 것이다. 한암조실스님의 성격이라 할까 마음 씀씀이의 자세라 할까, 아무튼 섭중(攝衆)함에 있어 조실스님은 언제나 바다와 같이 넓은 아랑을 지니고 계셨다. 그런데 인곡당은 젊어서 이후 공양구에 대해 푸념한 적이 없었다.

공양을 듣기 전에 무어라 염(念)하는가?(計供多少量彼來處忖己德行全缺應供正思良藥應受此食)공양의 다소를 막론하고 온 곳을 생각하나니나의 덕행 헤아리매 온전히 받을 만 하지 못하네마음을 막고 허물여읨에는 탐진치 등이 으뜸이라정히 좋은 약으로 생각하며 응당 이 밥을 받나이다수행인은 시주 은혜를 늘 감사히 여기고 시은(施恩)이 무거워질까 항상 반성하고 조심한다.

어느 조사스님 법문에, 출가인(出家人)이 수행하지 않고 음식을 함부로 수용(受用)하면 쌀알 한톨의 무게가 7근이니라. 한톨의 쌀알 무게가 일곱근이라면 한 숟가락의 밥은 과연 몇 백근이나 되며 이 무거운 밥을 먹고 어떻게 소화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시주밥 먹은 수행인은 시은을 갚기 위해서라도 촌각을 다투며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죽이건 밥이건 이밥이건 잡곡밥이건 간에 모두가 시은(施恩)이건늘 어찌 불평을 하고 푸념한단 말인가? 인곡당은 일찌감치 젊은 시절에 공양구에 대한 불평불만을 깡그리 접어서 시렁 위에 높이 놓았던 것이다. 상원선원의 여름철은 높은 산중인데다 짙은 숲속이어서 더위라고는 전혀 없다.

적요로움으로 충만한 상원사에는 세조대왕(世祖大王)이 봉안한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으로 유명해졌다. 세조가 조카인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뒤 강원도 영월(寧越)로 유배했다가 목숨마저 빼앗았다.그 뒤 문둥병에 걸려 몇해를 고생하다가 여기 상원사에 행차하여 문수기도를 드리던 중 몸이 가렵고 찜찜하여 절 이래 계곡으로 가서 물 속에 몸을 담그니 시원하기 그지 없었다. 등을 누가 밀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때마침 한 동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산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얘 동자야 나 등을 좀 밀어주련?”

예 하고 대답한 동자가 물 속으로 들어와서 등을 쓱쓱 문지르니 곪아터졌던 것이 말끔히 씻기매 너무도 시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얘야 어디 가서 상감 등을 밀었단 얘기일랑 하지 말아라.”

동자는 등을 다 밀어드리고 나서,

“예, 염려마십쇼. 상감께서나 문수동자가 등을 밀었단 얘기를 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이내 사라지는 것이었다.그 뒤 대왕의 문둥병이 씻은 듯이 나았으며 대왕은 불상 조성하는 불모(佛母)를 시켜 자신이 직접 친견한 문수동자를 조성케 하여 상원사에 모셨던 것이다.
 

 Copyright (C)  2001. Daegak.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