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58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답파천산설(踏破千山雪) …<8>


계유년(癸酉年)의 하안거를 마치고 산철이 무르익자 마하연선원(摩하 衍禪阮)의 소식이 행각승들의 내왕으로 드문드문 들려온다.


 식량난과 중수불사(重修佛事)로 인해 중단되었던 선원이 불사 회향을 계기로 다시 선객을 받는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수좌들은 선원 개설 소식보다 반가운 것이 없다. 선원이 없는 절은 발 딛을 사유가 없다. 그래서 수좌들은 각 절마다 선원이 있기를 갈망한다.


 선원(禪院).

 요즘 들어 선원이 있고 없고에 따라 선승들의 행보가 뜸하거나 잦아지는 풍속이 조금씩 선명히 나타난다.


 선원이 없는 절은 사찰령(寺刹令)을 빙자하여 한 둘씩 취지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었다.


 사찰령이란 일인(日人)들은 제청하여 31본산 주지회의에서 강제로 통과시킨 악법이다.

 

 가장 저주받을 악법은 출가사문이 자의(自意)에 따라 취처해도 무방하다는 조항이다.

 

 일본 승려들은 임제종(臨濟宗)을 빼놓고 전부 처자를 거느린다.

 우리 조계종(曹溪宗)은 역사적으로 수행종단이므로 지계청정(持戒淸淨)이 생명인데 일본 승려들처럼 파계하여도 좋다는 식의 사찰령을 반포하여 우리나라 불교를 왜색화(倭色化)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이에 현혹된 일부 승려들은 벌써 처자를 거느리는 타락상을 드러내고 있으니 수행승과의 거리가 자연히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객들은 선원이 없는 사찰을 찾아가는 것을 꺼린다.

 

 헌데 전국적으로 선원이 있는 절은 너무도 적다. 적은 만큼 선객들의 행동반경이 좁아질 수 밖에 없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마하연선원(摩訶衍禪院)은 경신년(庚申年)에 인곡당이 한철을 났던 인연이 있는데 병인년(丙寅年 ․ 1926년)에 재정사정으로 문을 닫았다.

 

 그 뒤 화응화상(華應和尙)이 원력을 세우고 화주(化主)에 나서서 낡은 건물을 헐고 59칸이나 되는 선방을 새로 지었다.

 

 바로 작년에 당우(堂宇)가 완공되자 다시 선방 문을 활짝 열었으며 이번 겨울철에는 만공(滿空)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전국 각지에서 운집한 53인의 선객이 동안거에 임한 것이다.

 

 이 53인 중에는 인곡당과 낯익은 얼굴이 몇 분 있었다.

 

 10년전에 함께 안거한 바 있는 효봉(曉峰)스님이 유점사 선원에서 옮겨 왔고 고암당(古巖堂) ․ 고송당(古松堂) 등 구참납자가 대거 운집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동안거를 계기로 입방규칙(入房規則)을 새로 제정하여 시행에 들어갔는데 요약하면 이러하다.

 

 입방규칙(入房規則)

 1. 승적등본을 지참할 것. 호적등본과 구족계첩(具足戒諜)도 필히 지참할 것.

 2. 의발(衣鉢)을 반드시 지참할 것.

 3. 품행(品行)이 방정(方正)한 사람.

 4. 신체 건강한 사람.


 이런 규칙은 각 선원에 이미 있어 왔지만 걸망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선객에게는 이런 것을 거의 따지지 않아왔던 것이다.


 마하연선원은 금강산의 중앙부분에 위치하여 해동제일선원(海東第一線院)이란 칭호를 받고 있어서 선객들 간에는 마하연에서 한철 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무척 많지만 정작 안거한 사람은 고작 5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선량(禪糧) 문제와 방사(房舍) 문제가 극히 제한된 때문이다.


 인곡당은 갑술년(甲戌年) 봄이 되자 남방으로 내려가고 싶은 생각에 잠겨 몇일간 망설이다가 마침내 걸망을 쌌다. 한암(漢岩)선사가 오대산(五臺山)에 마침내 괘석(掛錫)하여 수좌들이 몰려간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인곡당은 마하연에서 오대산까지 산길을 택하여 걷기로 했다.


 주머니에 노잣돈이 없을 적에는 무조건 걸어서 다니는 선객들의 생리가 반응한 것이다.

 

 인곡당은 오대산 상원선원(五臺山 上院禪院)에 생애 두 번째로 밟은 것은 스님의 나이 40세때(1934년)의 일이다.


 조실(祖室)이신 한암(漢岩)선사께서 병인년에 오대산으로 다시 들어오셔서 석장(錫杖)을 높이 걸자 전국 각지의 선객들이 몰려오는 것이었지만 큰절인 월정사(月精寺)에서는 선량(禪糧)관계로 한철에 30명을 초과해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달고 선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큰절에서 선량 외의 부담은 선원 자체로 해결하기를 바라는지라 원주(院主)스님의 활동의 몫이 매우 컸다.


 원주스님은 대중 중에서 철마나 선출하는데 두철 이상 소임에 임한 스님이 없을 정도로 책임이 무거웠다.


 인곡당은 12년 전에 안거한 전력을 인정받아 소임살이는 면하고 이제는 어엿한 중진급 구참인지라 용상방에 선덕(禪德)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인곡당은 예나 지금이나 ‘바윗덩이 수좌’란 별명답게 진종일 포단에서 떠나지 않는다.


 선덕(禪德)이란 조실스님 다음가는 큰스님을 지칭한다.


 대게의 경우 30년이상 수선(修禪)한 구참납자(久參衲子) 중에서 덕 있고 정진 잘하는 스님을 선덕으로 모신다.


 헌데 인곡당은 참선 경력이 20년째 밖에 안되는데도 선덕으로 추대를 받았으니 공부에 있어 다른 이보다 월등히 앞섰거니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기야 운문선원(雲門禪院) 조실로 5년여를 있었으니 상원선원의 선덕으로 손색이 없음은 두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조실스님은 큰절에서 주문한 대로 철마다 30명 이상은 방부 받지 않기로 맘속으로 다짐하곤 했지만 그것이 지켜진 예는 드물었다.


 그러니 철마나 선량(禪糧)이 모자라서 쩔쩔매었고 원주스님이 구해온 옥수수로 모자란 부분을 채우자니 발우는 늘 옥수수밥으로 채워졌다.


 옥수수밥을 만들자면 불을 두세번 때야 한다. 한번 때서 익은 것을 재차 끊여서 확 퍼지게 해야만 저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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