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57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답파천산설(踏破千山雪) …<7>


 각설하고, 인곡당이 보덕굴에서 하안거를 나게 된 것은 암주(庵主)인 성담(性潭)스님의 덕분이었다.

 성담스님은 보개산 심원사(寶盖山 深源寺)스님으로 은사스님이 80고령이신데 병석에 계시다는 기별을 듣고 갑자기 떠나게 되었는데도 맡길 스님이 없던 치에 인곡당이 나타나자 안심하고 내어준 것이다.


 성담스님은 10년 기도를 발원하고 지금 만3년을 채웠으며 장애없이 여일(如一)하게 정근해 왔다 한다.

 “인곡스님, 저희 은사스님에게 시탕(侍湯)이 끝나는 대로 돌아올 터이니 비우지 마시고 계시기 바랍니다.”

 “소승은 특별히 갈 곳도 없는 몸이니 여기 잘 있겠습니다. 마음 놓으시고 잘 다녀오십시요.”

 인곡당보다 예닐곱살 위인 성담스님은 때 묻지 않은 맑은 성품이다. 다른 스님 같으면 은사스님이 신양(身恙)이시다해도 막무가내로 기도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지만 성담스님은 특별한 사연이 있다한다.


 스님이 세살 적에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천애고아가 되었는데 마침 은사 스님이 그 동리를 지나다가 딱한 사정을 들으시고 등에 업고 심원사로 데려오셔서 길러 주셨다 한다.


 “저희 은사스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세살 적에 벌써 죽었을 겝니다.”


 성담스님은 심원사에서 잔뼈가 굵었고 은사스님 시봉하여 일대시교(一代詩敎)를 마치고 은사스님이 주지로 계실 적에 삼직(三職)소임을 두루 거쳤으며 3년 전에 주지로 대중스님이 추대하자 야반도주(夜半逃走)하여 여기로 왔다 한다.


 “중은 수행에 전념해야지 소임이나 살면 뭘 합니까? 삼직소임을 10여년 살고 보니 나이만 먹게 되던 걸요”


 성담스님은 걸망을 챙기며 지나온 얘기를 이렇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암주스님이 하산하자 인곡당은 성당스님 대신 관음기도에 들어갔다. 꼭 와보고 싶던 보덕굴이라 관음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심축(心祝) 해 온 지도 오래였는지라 맘껏 정진에 임했다.


 인곡당은 별 탈 없이 관음진신에게 백일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기도는 사분정근(四分精勤)으로 하고 나머지 시간은 좌선을 했다. 장

좌불와(長坐不臥) 한지 10여년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자리에 눕는 것이 어색한지라 밤새껏 꼿꼿이 앉아 삼매에 드는 것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무르익는 8월 초열흘에 암주인 성담스님이 귀사(歸寺)하였다.


 성담스님의 은사스님은 금년이 83세신데 성담스님의 시탕(侍湯)에도 불구하고 시적(詩的)하셨다 한다. 근래에 보기 드문 효상좌(孝上佐)임에 틀림이 없다.


 인곡당은 성담스님의 만류로 추석(秋夕)을 지낸 뒤 걸망을 쌌다. 큰절인 표훈사(表勳寺)에 선원이 개설되어 선객들 예닐곱분이 마하연과 유점사에서 옮겨와 있었다.


 표훈사는 화엄종주(華嚴宗主)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제자 표훈대덕(表訓大德)이 신림(神琳)대덕과 함께 중창하여 원래 정양사(正陽寺)이던 것을 표훈사로 개칭하였다.


 첫 창건은 서기 598년(백제 혜왕 百濟 惠王 원년)에 백제 스님 관륵(觀勒) ․ 융운(隆雲) 두 스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절 이름은 정양사(正陽寺)였다.


 표훈사는 금강산 안에서 첫손에 꼽는 교학의 본산이었는데 근래에 선원이 곳곳에서 개설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선원을 신설한 것이다.


 유점사와 마하연에서처럼 여기 선원에서도 만공(滿空)선사를 조실로 모셨지만 용상방(龍象傍)에만 올랐을 뿐 동안거 동안에 단 한차례도 왕림하시지 않았으니 왼 산에 눈이 엄청나게 쌓여서 통행길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눈에 파묻힌 금강산은 또 그런데로 적요롭고 한적하여 좌선하는데 그만이다. 기암절벽에 희끗희끗 내린 눈이 모진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도 볼 만하고 나목(裸木)이 밤새껏 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선객에게는 조도(助道)가 된다.


 겨울철의 금강산은 눈과 서북풍으로 단 몇 발자국도 행복할 수 없으리만큼 불편하다. 그래서 산개 각 사암에서는 선량(禪糧)과 화목을 넉넉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화목이 넉넉해야만 따스한 겨울을 날 수 있으므로 가을 내내 화목 준비로 전 대중이 운력하는 것이 해마다 치르는 연례행사다.


 일단 겨울을 나고 나면 봄과 여름은 딴곳으로 옮겨가기 싫어진다. 그만큼 금강산은 선객들을 붙잡아 매는 흡입력이 있는 모양이다.

 인곡당은 내친김에 여기에서 하안거를 났다. 위낙 행각에 둔감한 성품인데 다 도량이 무척 포근해 좋았기 때문이었다.


 인곡당은 한번 괘석(掛錫)하면 그 자리를 좀처럼 옮기지 않으려는 성품이어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철 나고 떠나지 않는다. 해제철에는 큰방을 지키는 선객이 너댓명에 불과하지만 인곡당은 결제철과 마찬가지로 가행정진(加行精進)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소임자 스님네는 ‘바위덩이 수좌’ 인곡당을 붙들려고 내심 애쓰지만 본인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포행을 나가 도량을 거닐 적이면 의례히 자기 머리를 만지는 습관이 있다. 이는 백양사 만암(曼庵)스님을 시봉하여 수학할 적에 강사스님인 만암스님이 학인들에게 훈계하기를,


 “우리는 세속을 등지고 출가한 대장부이다. 세속옷을 벗고 먹물옷 입었고 긴머리 깎아 온갖 세속 인연을 끊었다. 자주 자기 머리를 만지며 삭발수계(削髮受戒)한 사문(沙門)임을 깨달으라.”


 이런 가르침을 수없이 들었다. 머리를 만지며 출가한 의지를 되살려 공부에 게을리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인곡당은 포행하며 몇 번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맘속으로 ‘나는 중이다’, ‘나는 출가장부다’하고 마음을 굳건히 다진다.


 인곡당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출가장부임을 다짐하고 나면 환희심이 절로 난다. 내가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기에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서 출가장부가 되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복 받은 자신임을 절감하며 금생에 기필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판가름해야겠다고 굳게 다지고 또 다진다.

 Copyright (C)  2001. Daegak.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