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56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답파천산설(踏破千山雪) …<6>


금강산(金剛山)의 명소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직접 답사해 본 사람은 명소 아닌 곳이 없다고 하리라. 왜냐면 금강산은 왼통 물외선경(物外仙境)이기 때문이다.


 또 금강산에서 성경(星境)으로 어느 곳을 꼽겠느냐고 묻는다면 산 전체가 그대로 성경(星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성경 중에서도 성인(聖人), 즉 불보살님이나 나한(羅漢)님네가 시현(示現) 하신 곳이 성경 중 성경이 아니겠는가?


 유점사의 53불이 서역에서 오신 유래로 보아 성경(星境)일시 분명하고 보덕굴(普德窟)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이 현신(現身)하신 고사(故事)로 보아 성경이 아니라고 우길 사람이 없을 성 싶다.


 이 외에도 도처에서 이인(異人)을 친견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으니 금강산은 분명 우뚝 솟은 기암괴석(奇巖怪石)이며 골짜기 마다 옥빛으로 흐르는 시냇물이며 바위 사이에 아스라이 서서 푸르름을 자랑하는 초목들이 모두 진세(塵世)를 훌쩍 벗어난 선경인지라 화엄경(華嚴經)에서 법기보살(法起菩薩)이 만이천보살권속(萬二千菩薩眷屬)을 거느리고 상주설법(常住說法)하신다고 설하신 성경(星境)이요 영경(靈境)일시 분명하다.


 이러한 성경 유점사 선원에서 효봉(曉峰)스님, 고암(古庵)스님, 순호(淳浩)스님 등 53인의 대중 속에 끼어 정진하였다는 것은 분명 승연(勝緣)에 속하리라.

 헌데 선객은 철새와 같다는 말을 누누이 설명했거니와 해제일을 맞으니 53인의 대중이 하루 아침에 흩어지기 시작한다.


 걸망을 챙기는 납자에게 어딜 가느냐고 묻는다면 열이면 열이 금강산 구경이라고 답할 것이다. 어떤 스님들은 금강산에 들어온지 10년이 넘건만 그래도 구경할 곳이 아직 많다고 말한다.


 3월에 접어들자 날씨가 한결 따뜻해서 방안에만 앉아 있을 수가 없도록 산천초목이 손짓을 한다. 나목(裸木)에 잎이 돋고 맨땅에서 갖가지 풀들이 자라나서 산 전체가 푸르름으로 새롭게 단장하니 산뜻한 맛이 절로 나서 행각의 충동이 강하게 인다.


 인곡당은 오후에 대중 몰래 걸망을 쌌다.


 인곡당은 유점사에서 계속을 거슬러 마하연(摩訶衍)으로 가서 하룻밤 묵었다.


 마하연은 비로봉(毘盧峰) 바로 중턱에 있는 금강산의 중앙부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표훈사(表勳寺)에 들러 보덕굴 소식을 들었다.


 현재 살고 잇는 스님이 갑자기 경성(京城)으로 나가야 하는데 맡길 스님이 마땅치 않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인곡당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행여 놓칠세라 한 걸음에 달려갔다.


 보덕굴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49년(628년)에 보덕화상(普德和尙)이 창건하였다. 보덕화상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당나라 스님이라 한다.


 중국 서쪽지방인 사천성(四川省)의 어느 시골읍에 절세미녀가 어머니와 함께 이사를 왔다. 읍민(邑民) 중 총각들은 아가씨를 한번 보기 위해 울타리 너머에서 기웃거리기를 마지 않았다.

 아가씨의 어머니는 수많은 매파를 통해 청혼을 받고 마침내 이르기를,


 “닷새 후에 내가 직접 신랑을 고를 것이니 내 딸을 아내로, 맞고 싶거든 읍의 공회당(公會堂)으로 모이시오.”


 이를 여러군데에 방을 써 붙이기도 하였는데 과연 그 날 수백명의 총각들이 모이는 것이었다. 이들은 과거에 응시하려는 서생도 있고 장사하여 거금을 모은 이도 있고 부잣집 도령과 권세가의 자제도 있었다.


 어머니는 모인 신랑 후보들에게,


 “내 딸은 한사람인데 신랑 후보는 수백명이니 여러분의 능력을 시험해서 신랑감을 정하겠소.”


 하고는 금강경(金剛經)을 내어주며 하루동안에 다 외운 사람을 신랑감으로 정하겠다고 했다.


 만 하루 뒤에 금강경을 외워 온 총각은 백명이나 되었으므로 다시 원각경(圓覺經)을 외워오게 했더니 50명이 외워 왔다. 또 다시 능엄경(楞嚴經) 10권을 사흘동안에 외워오게 했는데 한 총각만이 외워왔다.


 그래서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신랑감에 뽑힌 총각을 정한 날짜에 가마를 타고 신부댁에 당도하여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신랑이 식장에서 신부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신부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자기방으로 가서 배를 움켜쥐고 꼬꾸라지는 것이었다.


 신부복을 입은 채 신음하던 처녀는 이내 싸늘한 시체가 되니 마침내 통곡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신랑을 그제야 기별을 받고 신부방으로 달려 갔으나 신부를 살려낼 수는 없었다.

 헌데 신랑이 보는 앞에서 시체는 금방 썩어 악취를 풍기는가 했더니 수만 수십만 마리의 구더기가 달려들어 신부의 살을 갉아먹어 삽시간에 뼈만 앙상하게 남는다.


 신랑은 신부의 어머니와 의논하여 장례를 치르고 무상(無常)을 절감한 나머지 머리를 깎고 산사(山寺)에서 수도하기 시작했다.


 수행승의 법명은 바로 보덕(普德)이니 이는 혼인하려던 처녀의 본명이었다. 보덕각시를 사모한 나머지 그녀의 죽음을 보고 무상을 뼈저리게 체험한 나머지 출가승이 되면서 그녀의 이름을 자기 법명으로 삼았다.


 보덕스님은 특히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을 평생을 두고 독송하기로 맘먹었다.


 스님은 고향을 떠나 중원(中原)으로 나와서 점점 동북방면으로 행각하더니 신라국(新羅國)에 금강산(金剛山)이라는 성도량(聖道揚)이 있음을 듣고 압록강을 건너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일년여 동안 금강산을 두루 돌아보고 보덕굴(普德窟) 자리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게 되었다.


 보문품을 지송하면서 관음보살을 친견코져 관음정진을 주야불철 하고 계속하기를 15,6년. 보덕스님은 손수 석벽에 관음보살상을 새기고 또 관음상을 돌을 쪼아 조성하였으며 내세에 다시 여기에 와서 수도하기를 발원하고 내세에는 기필코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하길 서원하며 정진하다가 입적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5백년 뒤 고려시대에 회정(懷正)스님이 여기에 와서 자신이 전생에 보덕굴을 창건하고 살았음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크게 깨쳐 명안종사(明眼宗師)가 되었으니 보덕굴은 실로 관음진신이 상주(尙住)하시는 성도량(聖道揚)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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