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을 겸비하신 천진도인(제48회)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

선심일여(禪心一如)…<3>

용성대선사 

  긴긴 겨울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는 사이 동안거를 해제(解制)한 스님은 보름 남짓 선방을 지키다가 날씨가 많이 풀린 2월초에 걸망을 쌌다.
  창수수좌는 뚝섬에서 나루를 건너 종로로 향했다.
  봉익동(鳳翼洞)에 자리한 대각사(大覺寺)에 당도한 것은 점심 때가 지난 미시(未時) 중각이었다.

  헌데 조실이신 용성(龍城)큰스님은 안계셨다. 도봉산 망월사(道峰山 望月寺)에 선회(禪會)를 개설하여 납승들을 제접(提接)하고 계신 관계로 대각사에는 한달에 두어차례 오신다는 것이었다.
  대각사에서 하룻밤 쉰 창수수좌는 망월사로 향했다.
  용성조실에게 삼배를 드리고 꿇어앉자마자 큰스님이 묻는다.
  "심마물(汁?物)이 이마래(恁?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는 물음이었다.

  이에 창수수좌는 주먹을 불쑥 내밀며 아뢰기를,
  "이마물(恁?物)이 여시래(如是來)니다."
  이러한 물건이 이렇게 왔습니다고 대답했다.
  큰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시며,
  "여시여시(如是如是)니라."
  그렇다 그렇다 하시며 수긍하신다.
  운문선원(雲門禪院)에서 호되게 방망이를 맞은 바 있는 창수수좌를 큰스님이 기억 하시는지가 궁금해진 창수수좌.
  "운문선원에서 빚진 것을 이제야 조금 갚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응? 운문선원에서?"
  "예. 제가 창수(昌洙)입니다."
  "오! 그렇구나 만암스님 생질이라 했던가?"
  "예, 저의 외숙입니다."
  "그래 그래…"
  큰스님도 만감(萬感)이 교차하시는지 잠시 말씀이 없으신다.
  "큰스님, 슬하에 거두어 주십시오."
  "음… 그래야지…"
  큰스님은 붓을 당겨 일필휘지(一筆揮之)하신다.

         示仁谷堂昌洙 丈室
   人心抱天地      玄谷又明明
   造化從斯起      亘古不生滅

  어진 마음이 천지를 감싸안으니
  깊은 골짜기 또한 밝고 밝도다
  온갖 조화가 이에서 일어나니
  영원토록 생멸하지 않도다

  큰스님은 창수수좌에게 인곡당(仁谷堂)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신 것이다.
  인곡당(仁谷堂)

  체구가 그다지 장대하지 않은데다 얼굴이 약간 검은 편인 스님의 천진스러운 모습에 어울리는 법호다.
  순하디 순하고 티없이 맑은 마음씨를 지닌 스님에게 용성큰스님은 인곡당이라는 법호를 주시며 입실제자(入室弟子)로 받아들이셨다.
  지금까지 창수수좌로 통해온 이름을 이제부터는 인곡당이라는 법호로 바꿔 부르기로 하자.
  법부주(法傅主) 용성선사에게 호된 방망이를 맞은 이래 이를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력(履歷)을 재차 보았고 23세에 사교입선(捨敎入禪)하여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무자화(無字話)와 씨름해 온지 9년째에 이르러 법부주에게 입실을 허락 받았으니 장하다면 장한 일이라 하겠다.
  선방을 드나들며 용맹정진만을 자신의 과업으로 알고 일관해온 인곡당은 스승님을 모시고 하안거에 들어갔다.


망월사  망월사(望月寺)의 만일선회(萬日禪會)에 운집한 선객은 60여명이나 되었고 수좌(首座)에는 석우(石友)스님, 선덕(禪德)에는 운봉(雲峰)스님, 입승(立繩)에는 설봉(雪峰)스님 등이 포진하였고 스님보다 한발 앞서 입실(入室)한 고암(古庵)스님이 스님 옆자리에 앉아 나란히 정진하였다.
  인곡당은 사형사제(師兄師弟)를 많이 얻은 것을 내심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용성큰스님은 선암사(仙岩寺)에서 선파당(仙坡堂)이라는 제자를 얻었고 천은사 상선암(泉隱寺 上禪庵)에서 안거한 인연으로 대하당(大呵堂)이라는 제자를 얻었으니 이 두 제자가 큰스님의 맏제자가 된다.
  그 뒤 혜일(慧日)을 상좌로 두었는데 혜일은 뒷날 큰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가 된 동산당(東山堂)이 바로 그 스님이다.
  그 이후 현 서울 종로3가 대각사(大覺寺)에 가만히 앉아서 20여명의 걸출한 제자를 얻어 큰스님의 문정(門庭)에는 늘 제자가 넘쳐났다.
  인곡당은 용성큰스님의 제자 순으로는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그러나 공부 잘하기로는 어느 사형사제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래서 용성큰스님은 인곡당을 맘 속으로 가장 아끼셨다.
  표면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 자기 공부를 착실히 지어가는 인곡당을 큰스님의 혜안(慧眼)이 놓칠 리가 없다.
  아무튼 만일선원의 하안거는 여러모로 값지고 알뜰했다.
  먼 뒷날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이 성공리에 마무리된 직후 종정(宗正)으로 추대된 바 있는 석우(石友)스님이 만일선원의 수좌(首座)로 있고 또 운봉(雲峰) · 설봉(雪峰) ·  고암(古庵)스님 등 이른바 "알짜배기 선객"들이 즐비한 가운데 60여명이나 되는 정진대중이 일사 불란하게 정진할 수 있었다.
  큰스님의 회상(會上)이 어째서 좋으냐고 묻는다면 여법(如法)하게 순일(純一)히 정진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리라.
  그런데 망월사(望月寺)는 재정이 그리 넉넉지 못하여 신도들의 성금으로 절반 이상을 채워야 했는데 용성조실을 위해 왕실(王室)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용성큰스님이 개기(開基)한 현재 서울 종로3가 대각사(大覺寺)도 최상궁(崔尙宮)이 자기 사제(私第)를 헌납하여 생긴 절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니와 만일선원의 선량(禪糧) 역시 왕실에서 거의 절반을 담당하였다.
  왕실의 최고 어른은 융희황제(隆熙皇帝)의 왕비(王妃)이신 윤대비(尹大妃)마마인데 이 마마에게 용성큰스님은 대지월(大智月)이라는 불명(佛名)을 지어 드렸다.
  대지월(大智月)이란 불명을 받은 윤대비마마는 마치 선원(禪院)처럼 수선생활(修禪生活)로 세월을 잊고 사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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